시공간과의 싸움, 빨래
월세 불평등에서 한 번 다뤘듯, '빨래'는 작은 집에서 큰 영향력을 미친다. 일단 옷은 여러 가지로 구분이 가능하다.
1. 안 입은 옷
2. 한두 번 입은 외투
3. 한 번 더 입 을 수 있을 것 같은 입은 옷
4. 빨기 위해 내 놓은 옷
5. 세탁 행거에 널려있는 옷
하지만 옷을 둘 공간은 여의치 못하다. 티셔츠나 블라우스 등 얇은 옷들은 그나마 한 번 입고 잠시 뒀다가 입기 편하지만(이마저도 안 빤 옷들이 의자와 세탁기 앞에 쌓이는 일이 반복되면 그냥 한 번 입고 빨아버린다) 니트와 바지는 난감하다.
다들 니트를 한 번 입고 빨아버리는지? 니트는 다른 빨래와 같이 세탁하기에 애매하다보니 계속 쌓인다. 결국 내가 입을 게 없어서 두세 개만 넣고 세탁을 돌린다.
빨래도 한 번에 다 하지 못하고 니트, 수건, 흰색 옷 따로 빨다 보면 세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탁물이 여전히 쌓여있다. 한 번 입고 옷을 빨아버릴 수 있고, 큰 분류 없이 조 금씩 나눠서 세탁을 할 수 있고, 빨래 행거의 옷이 잘 마르는 기간은 아주 짧다. 봄부터 초가을까지? 이마저도 장마기간이 빠지면 더 줄어 든다.
중간 중간 과정이 생략될수록 좋은 것이 집안일이 아닐까? 생략되는 과정이 많고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때인 이 짧은 기간에는 우리 집에 흩어져있는 시공간의 상황이 크게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계절에, 옷의 선순환이 일어나지 못하면 어딘가 진행되지 못하고 쌓여있는 구분점이 생긴다. 나의 경우 주로 한 번 더 입으려고 의자위에 올려둔 후드 티와 빨기 위해 따로 빼 둔 니트였다.
나의 몇 안 되는 후드티는 새로운 옷장을 찾은 것처럼 의자 위에 차곡차곡 쌓아져 있었고, 추운 겨울 날 따뜻한 니트를 입기위해 찾아보면 그저께 빨았지만 아직 덜 마른 채로 빨래 행거에 널려있었다. 겨울의 빨래는 부피가 커 한 번에 많이 빨지도 못하고, 널지도 못한다. 게다가 다른 계절에 비해 빨래가 잘 마르지도 않는다. 며칠동안 행거에 널려있는 날이 생기는 것이다. 절대로! 내가 귀찮아서가 아니다. 이런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적당히 선반과 세탁기, 빨래 행거에 나눠져 있어야하는 수건과 옷들이 어딘가 집중되어 쌓여있는 공간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혼자 살며 가장 나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은 빨래였다. 빨래는 시공간의 싸움이다. 원룸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수없이 많은 옵션 사항도 고려해봐야 하지만, 침대와 빨래 행거와 나의 동선이 제대로 나올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여름엔 습해서 ,겨울엔 두껍다는 이유로 잘 마르지 않은 채 빨래는 오랜 시간 내 옆을 차지한다. 어느 순간 수납장에 들어가지 않고 세탁기와 빨래 행거의 무한 루트만 타는 옷들도 생긴다.
나같은 경우에 수건이 그렇다. 다들 아닌가...?
겨울의 수건은 가습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빨래 행거를 거치지 않고 의자 위에 널렸다가 다시 수납장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분리형 원룸이 가고싶은 이유는, 분리되었을때 분리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대한 기준은 단연코 빨래 행거였다. 나는 빨래 행거를 펼쳐 둘만한 공간이 분리가 되어있어야 진정한 분리형 원룸이라고 판단한다.
빨래가 널려 있는 행거가 방에 있으면 우리 집이 성황당처럼 느껴진다. 흰색 검은 색 옷 밖에 없는 것 같은데, 행거 위는 어찌나 알록달록한지 엄마의 잔소리 그대로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모양새다.
이 방에서 굿이라도 한 판 해야 할 것 같지만, 색색의 수건과 옷이 걸려있는 집 꼬라지를 보아하니 귀신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갈 것이다.
여름이나 겨울엔 어쩔 수 없이 빨래를 들고 빨래방으로 향한다. 오천 원과 나의 공간을 바꾸는 셈이다. 빨래의 질도 달라진다. 보송보송한 수건들을 보면 돈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엔 건조기에 돌리면 안 될 것 같은 옷을 신중히 가려내어 빨래방을 향한다. 한 번의 빨래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건조기를 처음 이용할때나 신경썼지 요즘은 줄어들면 그것이 너의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모두 건조기에 돌려버린다. 소형 건조기를 둘까 심각하게 생각해보지만 건조기 특유의 발열이 집안 공기를 아주 후끈하 게 만든다는 후기를 듣고 건조기를 집에 들이는 것은 포기했다. 겨울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여름, 30도를 육박하는 실내 온도에 건조기를 들이는 것은 새로운 지옥을 내 스스로 만드는 행위다! 그 외에도 소음과 소형 건조기의 양을 생각한다면, 저렴하게 나온 건조기를 사는 것 보다 그때 그때 빨래방의 큰 건조기를 사용하는 게 더 싸게 치인다. 이렇게 저렇게 빨래 행거가 집에 펼쳐져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했지만 시도도 하지 못 하고 계산기만 두들기다가 끝이 났다.
지금 나의 집은 다행히 빨래 행거와 내가 분리 되어있다. 우리 집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베란다에는 365일 빨래건조대가 펼쳐져 있고 세탁물 역시 베란다에 던져놓는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자연스럽게 의류관리기의 역할을 해주어 음식 냄새가 밴 옷들을 어디 둬야하는지에 대한 걱정도 줄어든다.
처음 이 집에 이사 왔을 때의 베란다의 활용은 2평까지 빨래 보관함 따위가 아니었다. 날씨가 좋을 땐 여기서 커피 마셔도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실제로 베란다에 둘 캠핑의자도 샀지만... 커피는 카페에서 마시거나 방안에서 티비를 보면서 마셔도 된다. 처음 독립을 하면서 부지런하게 움직일 욕심으로 접어서 간편하게 세워둘 수 있는 건조대를 샀지만, 이미 당근으로 무나한지 오래. 큰 베란다를 최대한 활용하고 이불도 널 수 있는 큼지막한 빨래 헹거를 구입했고 그 행거는 베란다의 절대자처럼 1년 넘게 그대로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