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재인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 중
마지막 순간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라곤 앞서 가던 화물차의 뒤꽁무니가 갑자기 눈앞으로 빠르게 달려왔다는 사실, 그리고 몸 여기저기에서 뚝뚝 소리가 났고 핸들에 그녀의 가슴이 거세게 부딪혔으며 에어백이 터지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였는데, 그 기억이 무색하게 온몸이 멀쩡했다. 생채기 하나조차 없었다.
이곳이, 저승이란 건가. 그녀는 똑바로 섰다. 눈앞은 뚫려 있었는데 모퉁이를 돌자 계속해서 좌우로 정렬된 벽돌담이 그녀를 맞이했다. 미로…… 미로같이 생겼구나. 아마, 여길 빠져나가야만 하는 건가 보다.
남편과는 소개로 만났다. 좀 맹한 사람이긴 한데, 착해. 그냥 밥 한번 먹는다 생각하고 만나. 그것은 소개를 시켜 준 친구의 말이었다.
뭐 먹으러 갈까요? 그녀의 말에 그는 아, 몇 개 찾아 놓긴 했는데…… 실은 제가 경기도 사람이라 이쪽 지리를 잘 몰라서, 추운데 헤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괜찮으시겠어요? 하고 물었고 그 괜찮으시겠어요, 에 그녀는 또 반해 버렸다. 소개로 만나면 무조건 남자가 장소를 정해야 한다느니, 하는 그 고루한 규칙 아닌 규칙들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픽 죽어 버렸다. 어머 그럼, 전 여길 잘 아니까요, 그녀는 주머니 속에 있던 손을 꺼내 남자의 코트 소매를 잡았다. 그럼 제가 좋아하는 데로 가요. 고르세요. 중식도 있고요, 태국 음식점, 시칠리아 음식점, 그리고 바지락칼국수! 남자는 머쓱 웃더니 소개팅인데 칼국수 드시면 제가 죄송하죠, 하고 대답했는데 그녀는 고개를 젓곤 물었다. 소주 좋아해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자 그녀는 그를 끌어당겼다. 너무 추우니깐, 칼국수에 소주 한잔 마셔요.
결혼한 후에도 삶은 맛있게 끓었다. 넘치지도 않고 졸아 버리지도 않게 적당히, 간이 잘 배어 있었다. 남편은 그녀보다 항상 조금 먼저 퇴근했다. 오늘은? 나가사키 짬뽕. 오늘은? 시원한 얼갈이된장국. 오늘은? 칼칼한 동태탕이지. 오늘은 뭐로? 오늘은 오빠 먹고 싶은 걸로. 사무실 문을 나오면 늘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메뉴를 물었고 답을 들으면 곧장 마트로 향해 필요한 것들을 척척 사 오곤 했다. 그는 요리를 썩 잘했는데 그래도 언제나 그녀는, 미리 해 놓지 마, 같이해, 라고 말했다. 그래서 재료를 식탁 위에 올려 놓고,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며 그는 그녀가 퇴근하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엔....
내일 다음화가 이어집니다.
교통사고로 저승에 머물게 된 여자. 미로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을 떠올립니다. 처음 만났던 순간, 그리고 결혼생활 동안 행복했던 기억.
그 기억 중에는 늘 먼저 퇴근해 장을 보고 기다리던 남편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과연 무슨일이 생긴걸까요?
독특한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여성의 이야기들
낮에는 복싱, 저녁에는 암벽을 등반하며
매일 한 편의 글을 쓰는 작가 설재인.
서울대 수학교육과 졸업 후 교사로 일하다
퇴직하고 무급의 복싱 선수가 된
소설가가 선보이는
여성이 주인공인 12개의 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