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재인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 중
그날엔 회의가 있었다. 나 오늘 회의 조금 늦게 끝날 것 같아, 오늘은 오빠 먼저 밥 먹을래? 아침에 재킷을 휙 둘러 걸치며 그녀는 물었다. 아냐, 기다릴게. 그는 웃으며 그녀의 볼을 톡톡 쳤다. 대신, 메뉴는 내가 정할게. 회의하느라 전화 못 받을 거 아냐. 오케이, 알겠어. 그럼 이따 보자. 구두를 꿰고, 현관을 나섰다.
그랬었다.
자, 회의 들어갑시다. 부장의 말에 그녀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놓곤 다이어리와 볼펜을 챙겨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는 지루하게 질질 끌며 이어졌고 일곱 시 반에 끝날 예정이었는데, 여덟 시 반까지 이어졌다. 부장이 회의실의 시계를 치워 놓아서, 그렇게 오래 했는지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어쩐지 엉덩이가 아프더라. 투덜대며 다시 자리에 앉아 퇴근 준비를 하려는데, 부재중 전화가 스무 통이었다.
열 통이라니. 무슨 일일까. 뱃속이 서늘했다.
짐을 대충 챙겨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두 번 가기도 전에 상대는 전화를 받았다. 진아야! 여자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응 언니, 전화했었네, 회의…… 라고 대답하려 하는데 여자가 듣지도 않고 대뜸, 외쳤다.
진아야, 네 남편 마트에서 쓰러졌어!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저녁 찬거리 사러 마트 갔는데 어디가 시끌벅적한 거야, 그래서 가 봤더니 네 남편이 쓰러져 있었어. 마트 한복판에. 사람들이 일일구에 신고하고, 그래서 병원으로 싣고 갔어.
무슨 말이야, 그게?
아이고, 괜찮을 거야, 진아야. 그렇게 쓰러지면서도 바지락 봉지는 꼭 붙들고 있었다니까…… 아마 지금쯤 깨어나지 않았을까. 그래도 얼른, 얼른 병원 가 봐. 병원에서 연락 안 왔어?
무슨 말이야, 그게?
신호는 자꾸만 빨간불로 바뀌고...
내일 다음화가 이어집니다.
그냥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평소처럼 먼저 장을 보겠다고 한 남편, 그리고 늦어진 회의. 그 끝엔 부재중 전화 스무 통. 장을 보던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바지락이 뭐라고, 바지락 봉투를 손에 꼭 쥐고 쓰러진 걸까요?
독특한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여성의 이야기들
낮에는 복싱, 저녁에는 암벽을 등반하며
매일 한 편의 글을 쓰는 작가 설재인.
서울대 수학교육과 졸업 후 교사로 일하다
퇴직하고 무급의 복싱 선수가 된
소설가가 선보이는
여성이 주인공인 12개의 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