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톺아보기
1. 미자는 아름다움을 동경한다. 시상을 채집하고 꽃내음을 맡으며 세계의 얼굴들에 성실하게 감응하며 산다. 그녀에게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나 절망스러운 사건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를 생각하는 동안 세계에는 오직 미자와 시만이 존재한다. 미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잊고 싶은 것들에 대한 망각을 선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우리에게 알츠하이머를 얻기 전에도 망각하며 살았다고, 부단히 사랑한 탓에 철저히 망각하며 살았다고 말한다. 사랑은 여전히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강령(綱領)이다.
2. 그녀의 삶의 한 저변에는 시가, 다른 한 저변에는 아픔이 자리하고 있다. 그녀 안에서 일어나는 시와 고통의 권력 싸움은 결론이 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은 어떤 것도 마취일 뿐 영원한 치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떤 고통도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토록 잔인하고 위대한 삶의 진실이야말로 우리가 굳게 붙들어야 하는 믿음이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미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만큼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 어디에 있나요?" 사랑과 아름다움과 절망을 오롯이 그 자체로 만드는 것은 무상(無常)이다.
3. 미자의 위대함은 그녀에게 주어진 환경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녀는 파출부로 살면서 자신을 고용한 사람으로부터 몸을 요구받았고,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몸을 더럽히며 자기 존재를 거룩하게 만들었다. 신은 그녀에게 아네스의 밭에서 알츠하이머를 선물했다. 그녀는 자기만이 거룩하며 자기만이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듯이 제 몫의 삶을 살아낸다. 그녀는 시를 쓸 줄 몰라 여기저기 시를 쓰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묻지만, 그녀야말로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다. 시상은 참 사람에게만 자기의 곁을 허락한다.
4. 미자는 딸에게 집에 찾아오라고 일러두고 사랑하는 자기 손주를 경찰서에 보냈다. 하지만 미자는 딸이 찾아온 이후로 더 이상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녀가 평소에 다녔던 장소들을 비추고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녀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영화는 오직 미자의 시와 희진의 목소리만 우리에게 들려줄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다시 우리에게 나타난다. 한 세월의 시간에 웃음 짓는 희진의 얼굴이, 한 세월의 시간에 아파하는 미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