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 한강
동물은 채식 동물과 육식 동물로 나뉘는데 육식 동물은 다른 어떤 개체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육식 동물로 분류할 수 있다. 직접 죽이지는 않지만 살육을 방조하고, 포장육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 인간은 채식 동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영혜가 선택하게 된 길이기도 하다.
본래 영혜는 아주 평범한 여성이었다. 작품의 독백자인 남편의 말처럼 특별한 매력이 없지만 특별한 단점도 없고, 무난한 성격이 편안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평범했던 이 주부가 어느 날 급작스럽게 변한다. 그 계기는 ‘꿈’ 이었다.
이해할 수 없겠지. 예전부터 난, 누군가가 도마에 칼질을 하는 걸 보면 무서웠어. 그게 언니라 해도, 아니, 엄마라 해도, 왠지는 설명 못해. 그냥 못 견디게 싫은 느낌이라고밖엔.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들한테 다정하게 굴곤 했지. 그렇다고 어제 꿈에 죽거나 죽인 사람이 엄마나 언니였다는 건 아니야. 다만 그 비슷한 느낌, 오싹하고, 더럽고, 끔찍하고 잔인한 느낌만이 남아 있어.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느낌,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살해한 느낌,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 단호하고, 환멸스러운, 덜 식은 피처럼 미지근한.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어두워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책에서 영혜의 꿈은 이탤릭체로 인쇄되어 있다. 늦은 밤에 혼자 읽고 있으면 섬뜩해지는 내용이 많다. 상기 인용 단락에서 영혜는 누군가를 죽이고 칼로 썰고 있는 장면에 대한 원초적 공포를 토로한다. ‘덜 식은 피’ 같이 소름 끼치는 공포이다.
필자는 대학생 시절 농활을 갔을 때 시골 마을 공터에서 살아있는 돼지를 도살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돼지는 철사에 발이 묶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울고 있었다. 동물도 눈물 흘린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마을 아저씨 분들은 먼저 도끼로 돼지 머리를 쳤고(처절한 ‘꽥’ 소리가 났다), 그 다음에는 식칼로 돼지 목을 깊숙히 찔렀다. 돼지가 죽은 다음 우리 학생들에게도 육회 접시를 대접해 주었는데 고기는 아직 따뜻했다. 그 때의 감촉을 10년을 지나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멀쩡히 옆에서 죽이는 걸 본다면 고기 먹는 게 꺼림칙해 질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육식주의자 인간들은 포장육 덕분에 죄책감 같은 걸 모르고 산다. 하지만 평범했던 여성 영혜는 마침내 예민해지고 고결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건 어린 시절로부터 내려온 심리적 트라우마가 ‘꿈’ 의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