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0월 7일 월요일
오늘은 원래 가탄-송정, 송정-오미까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내가 다소 지친 것 같기도 하고 한 구간을 하기에는 다소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도 같고 해서 고민하다가 오미에서 난동까지 가장 긴 한 구간을 미리 걸어 두기로 한다. 검색해 보니 오미 운조루 유물기념관 주차장이 잘 되어 있다고 해서 그곳을 출발점으로 해서 오늘 하루를 보내고 내일은 화개중학교가 있는 가탄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둘레길 걷기 순서를 잡았다. 아침에 오미마을 운조루 유물기념관에 차를 주차하고 출발하니 9시가 조금 못 된 시각이었다. 오미마을에서 들판을 가로질러 용호정을 찾아 둑길을 걸어가다 보니 이 구간은 섬진강을 따라가며 구례 시내를 통과해 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치 산청 시내를 가로질러 가던 구간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곡전재라는 전통 가옥에 대한 안내를 읽으며 가다 보니 각 지자체마다 걷기 길을 잘 만들어 놓는 것이 요즘 분위기 같은데 구례는 충무공의 사적을 활용하여 백의종군로를 별도로 개설하여 지리산 둘레길과 연결시켜 놓은 모양이다.
강을 따라가면서 보는 물길과 잘 만들어 놓은 데크길이 걷는 운치를 배가해 준다. 그렇지만 며칠 계속 걸어서인지 집사람이 꽤 피곤해하는 느낌이 든다. 길과 그 길이 제공하는 풍경은 좋은데 인간의 신체는 왜 이리 연약한 것인지 발이 무지근하고 뻐근한 통증이 바닥으로부터 화끈거리며 올라온다. 내 기준에 맞춰 걸으면 아내에게 무리가 될까 봐 조심스럽지만 한편으로 이번에 일단 한 바퀴 돌기를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도 슬슬 차오른다. 어제에 이어 비가 살짝 흩뿌리는 날씨를 보이는 가운데 용호정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시던 주민 두 분이 우리가 인사를 하고 다가서자 자리를 피해 주신다. 이때가 거의 10시가 된 시점이었다. 용호정 툇마루에 앉아 간식과 물을 조금 먹고 다시 길을 이어간다.
약간 흐린듯한 날씨에 잔잔한 수면은 걷기의 운치를 더하는데 이 길이 길긴 길다. 둘레길 표지인 벅수와 백의종군로 표지가 나란히 서서 우리에게 길을 안내한다. 이정표란 누군가가 이미 그 길을 오래전에 걸었다는 점과 그 길이 무주공로가 아니라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길을 가는 자에게 알려줌으로써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내가 가는 이 길은 누군가가 이미 걸은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저 코헬렛의 유명한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세상은 시공간의 축선이 교차하면서 이어지는 하나의 역동적인 관계의 장이다. 임진왜란의 그 처절한 역사적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백의종군로라는 이 길도 역시 그러한 사례가 아니겠는가. 기억하는 자에게는 과거는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강력한 실재로 현존하는 것이다. ‘베니타스 베니타툼 옴니아 베니타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 이 두 진술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모든 것이 사라지고 헛될 뿐이지만 하느님의 시각으로 보면 모든 것은 현재적 상황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바람직한 삶의 태도는 하느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허무할 뿐이다.
구례 시내를 통과하여 온수동을 지나 난동 마을에 도착한 시간이 3시 20분쯤 되었다. 이 구간은 평이한 길이지만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런 특성이 있다고 기억해 둔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좀 쉬면서 체력을 보강하기로 한다. 며칠간 만들어낸 빨래도 하기로 하고. 택시로 오미마을까지 회귀한 후에 차를 갖고 산동면에 있는 숙소로 가다가 산동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보았다. 저녁 식사를 하고 세탁물을 갖고 세탁실로 가서 빨래를 했다. 세탁기와 건조기 이용이 각각 3,000원씩이니 제주 00 리조트 보다 싼 편이다. 집사람이 발에 피곤이 쌓이는 모양인데 같이 걷고 싶은 나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아내만큼 걷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다. 50대 후반의 주부 중에서는 그래도 체력이나 인내심이 순위 내에 들지 않을까 싶다.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 해파랑, 남파랑, 서파랑 길은 물론이고 산티아고 순례길도 포함해서 모든 걷기 길은 비용이 수반된다. 그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와 시간적 여유, 체력적인 측면 모두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걷기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오버투어리즘에 대한 아우성이 들끓고 있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생계나 생존을 위한 실용적인 목적 외에 다른 공간과 다른 문화를 관람하기 위해 여가 활동으로 일시적으로 이동하는 여행이 거대한 산업이 되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생성하는 시대에 우리는 사상 처음으로 살고 있다. 마르코폴로나 이븐 할둔 같은 사람들의 여행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양면성을 지닌 존재다. 유목적인 기질과 정착민적 기질 모두가 인간을 규정한다. 나는 안정성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지만 가끔 내 안에서 떠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욕구는 어떻게든 해소되어야 하면 무시하면 안 된다. 무시된 욕망은 삶을 끊임없이 교란시키면서 혼란을 초래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