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순례(2)

by 차거운

지난 21일 토요일에 대구 처형이 수원과 맞붙은 용인에 있는 아들, 나에게는 처조카 되는 친구의 집에 수리를 마친 집 정리를 위해 올라오셨고 집사람이 거기에 가보자고 하기에 이왕이면 성지 순례 일정을 함께 곁들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경기 남부 지역의 최양업 신부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세 곳에 들렀다가 처조카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우선 안양에 있는 수리산 성지에 들렀는데 10시가 넘은 토요일이라 길이 녹록지는 않았다. 최양업 신부님의 가족이 청양 다락골에서 서울로 이사했다가 다시 이곳에 정착해서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하기 전까지 머무른 곳으로 알고 있다. 전에 학교에서 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의 기억과도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순례자 성당이 있고 고택 성당이 따로 있어 미사가 유동적으로 장소를 옮겨 있는 모양이다. 개울을 건너면 십자가의 길이 순교자들의 삶과 예수님의 수난이 겹치는 묵상과 기도의 과정으로 제시되어 있다. 순교자들을 짓누른 죽음의 기억이 가는 성지 곳곳에 남아 있다. 동시에 그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 역시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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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님의 모친인 이성례 마리아의 마지막 순교 직전 행적은 오점 하나 없이 완전무결하게 곧장 구원으로 달려가는 확고한 신앙인의 모습과 달리 자식들로 인한 인간적 갈등으로 돌아섰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 흔들림의 궤적으로 인해 우리에게 인간적인 위안과 격려를 주는 바가 있다. 엔도 슈샤쿠의 ‘침묵’을 읽으면서 느꼈던 일본 신자들에게 강요된 후미에의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왕의 전통과 신앙에 대한 훼절 요구를 거절하고 차례차례 죽어간 유다 형제들 이야기도 결국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가장 본원적인 욕구가 살고자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몰가치적인 삶은 생물학적으로는 삶일지언정 정신적으로는 죽음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믿음이란 가치의 서열과 체계에 대한 확신인 셈이다.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읽으면서 삶의 길고 짧음이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생각한 적이 있다.

수리산을 떠나 손골이라는 처음 가보는 성지에 들렀다. 이곳은 현재 용인시에 해당하는데 이번에 최양업 신부님의 흔적을 찾아 방문한 성지들은 하나같이 산속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다. 그래도 현재 손골 성지 주변에는 전원주택 단지처럼 잘 지어진 집들이 고속도로와 사람들의 대단위 거주지 사이에 숨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들어서면 예전의 모습 그대로 외지고 호젓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곳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 사제들이 사목을 준비하던 교두보와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여러 선교사들이 거쳐가고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풍습도 익히고 그랬다고 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교회의 맏딸이라고 불리던 프랑스 교회는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은 이 먼 조선이라는 극동의 나라, 죽음이 위협하는 선교지로 모든 것을 걸고 떠나온 것이다. 그들은 이끈 것은 신앙이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위해 우리는 움직이게 마련이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모든 것을 팔아 보물이 묻힌 밭을 사듯. 세상의 논리를 뒤집는 이 역설의 삶을 생각하면 이 머리가 감당하기 버겁다는 느낌을 받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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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골에서 떠나 다시 한덕골이라는 곳으로 간다. 여기도 용인시에 해당하고 김대건 신부님의 가족이 머물러 살았고 최양업 신부님이 사제가 되어 여기에서 가족과 동생들을 재회한 곳이라고 한다. 부모가 세상의 칼날에 순교한 뒤에 고아로 남은 어린 동생들을 재회했을 때 신부님의 마음은 또한 어떠했으랴.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그 아픔들을 딛고 나아가는 삶의 행로는 어떤 것이었을까. 새삼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절실하게 살아본 적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본다. 여기에는 넓지도 않고 주차할 만한 곳도 마땅하지 않지만 조촐하게 야외 미사를 할 수 있도록 터를 잡아 가꿔 놓았다. 모든 곳을 대규모로 성지로 조성하려고만 할 것은 아니고 잘 기억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현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삶과 잘 조화를 이룰 수 있고 이물감 없이 이곳이 믿는 이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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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돌려서 조카네 집으로 갔더니 아직 집 정리가 끝나지 않아 어수선하지만 새로 내부수선 공사를 마쳐서 새로 입주한 집처럼 깔끔한 것이 좋아 보인다. 광교 호수와 맞닿은 곳이어서 수원의 광교신도시와도 연결되는 지점이고 고속도로 접근성도 좋아서 재택근무를 하면서 살기에는 괜찮아 보인다.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시간이 늦어서 그리 막히지 않았다.

일요일인 22일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다섯 군데의 순례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우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종로 3가에서 내려 종로성당으로 갔다. 이곳이 당시 포도청이 있던 주변이고 각지의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 끌려와서 분류되고 배교를 강요당하고 하면서 처형을 당하기 위해 대기하던 곳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끌려오고 처형장으로 가서 생을 마감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기록들이 생산되었다. 그 문초와 단죄의 기록들은 오늘날 순교자의 영예를 얻는 자료가 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사학 죄인과 순교자의 영광 사이의 간극과도 같이 세상은 이리저리 가라고 하고 하늘의 목소리는 다른 곳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니 말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에서와 같이 우리는 어쩌면 이중국적자인 셈이다.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또 다른 세상의 시민이기를 희망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갈등이 없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종로성당 지하에서 해설사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린다. 그들을 기억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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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광화문 시복 터로 이동한다. 광화문 광장, 공원. 탄핵을 위해 사람들이 모이던 자리. 목소리들이 부유하는 곳. 두 사람의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에서 광장은 갈등과 이질적이고 상충하는 목소리와 감정과 논리들이 흘러 다니는 통로였다. 그곳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124위에 대한 시복식을 거행했다. 세월호 유족들의 손을 잡아준 곳이기도 하고. 세상과 하늘나라가 조화롭게 만날 수 있는 날들이 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서로 어긋나는 날들이 더 많으리라는 예감을 지울 수가 없다. 그 긴장의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가짜 메시아들이 존재하는지 생각하면 그 독성의 목소리들이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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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선을 타고 여의공원역에 내렸다. 조순 시장이 여의도 삭막한 광장을 공원화하는 작업을 한 이래 이 녹지는 정말 소중한 곳이 되었다. 이곳은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한국의 순교자 103위에 대한 시성식이 열린 곳이다. 세종대왕상 근처의 기념 표지석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서서 용산의 당고개 성지로 간다. 여기는 사형장이다. 최양업 신부님의 어머니가 배교를 번복하고 모질게 모정을 돌이켜 신앙고백으로 죽음을 받은 곳이다. 사람의 능력과 본성으로는 차마 감행하기 어려운 결정이리라. 이와 관련해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차라리 적절하다.

당고개를 거쳐 명동에 도착하니 4시 40분이 넘었다. 시복, 시성터의 스탬프를 역사 기념관에서 찍으면서 보니 주교관 앞뜰이 보이고 거기 00 여고 3학년 쪽 건물이 보인다. 저기서 22년을 보냈는데 하는 감회가 새삼 솟구친다. 모든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조금씩 희미해질 뿐. 명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5시 미사에 참석했다. 이곳에서 입학식 졸업식 행사를 미사로 치르던 기억들이 새롭다. 그런 기억들은 지금 생각하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전에는 이곳이 딱히 성지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날마다 지나치면서 살았던 장소인데 지금 떠나고 보니 지금은 일부러 찾아와야 함께할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다. 성물방에 들러 책 두 권을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 시내 다섯 곳의 순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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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하루는 피곤해서 쉬기로 하고 화요일인 24일에 다시 길을 떠났다. 인천 서구에 있는 접푸리 공소터인데 차라리 녹청자 박물관으로 찾는 것이 빠르다. 박물관 입구에 스탬프가 있는데 관련 표지나 안내문이라도 협조를 받아 설치를 하면 좋을 듯하다. 다음으로는 파주에 있는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찾아 이동했는데 많이 소식을 듣기는 했으나 이번에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어 의미가 남다르다. 이 민족의 분단 현실과 이로 인한 고통의 역사를 언젠가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은 필요하고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분단은 우리에겐 통곡의 벽과도 같은 것이리라. 파티마의 성모님이 러시아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듯이 이 분단의 벽이 무너지도록 우리가 기도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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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돌려 예전에 군생활을 하던 연천을 지나 철원 김화 성당을 향했다. 김성 공소터는 현재 북쪽이라 김화 성당을 대체 확인지로 삼은 듯하다. 이곳은 군부대가 중요한 경제 요소라 주말에 활기를 띠는 것은 모든 접경지가 비슷한 것 같다. 늦은 점심을 감자탕으로 해결하고 화천의 만산이라는 곳을 향해 갔다. 도로 초입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만산 공소터를 찾아가는 길은 한 4km 정도 거리를 외길로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차라도 한 대 마주치면 외나무다리와 같은 형국이라 난감 그 자체다. 여기는 문제가 있다. 걸어서 가는 것도 만만치가 않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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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군용 차량이 한 대 마주 오다가 내 차와 마주쳤는데 친절하게도 스스로 길을 비켜주려고 언덕길을 후진한다. 그래서 내가 뒤로 간신히 틈을 내고 차를 세운 다음 내려오라고 내려서 손으로 신호를 하니 다가온다. 이 깊은 곳을 올라가는 것을 의심이라도 할까 봐 성지 순례 중이라고 하고 사람들이 좀 있는지 물어보니 거의 없고 등산객 한 사람이 표지판 앞에서 사진을 찍는 걸 봤다고 한다. 운전자가 상사 계급장을 달고 있는데 내 눈에는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나이가 든 셈인가. 그러니 모든 것은 상대적이겠다. 군대에서 생활할 때 상사는 나이로나 계급으로나 엄청난 느낌을 주는 존재였는데 말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누르며 도착하니 안내판과 스탬프가 산속 깊은 곳에 있다. 주변에 거의 한두 집이 산채처럼 숨어 있다. 들어온 길로 다시 돌아 나와야 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화천이라는 곳이 참 오지스럽다. 정말 다시 말하거니와 신앙 선조들은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 신앙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고 그들을 위해 사목을 하는 사제들도 발바닥이 다 터지도록 걷고 걸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어긋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일이다.

연천군 백학면에 계신 양 수녀님을 한 번 뵐 수 있을까 하고 전화를 드렸더니 반갑게 응대해 주시면서 환영한다고 하셔서 화천에서 귀가하는 길을 그곳으로 돌려 잡았다. 거의 저녁 6시쯤 되어 도착하니 저녁기도 시간에 방해가 될까 걱정했더니 괜찮다고 하신다. 저녁을 차려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집 한 채와 강아지 ‘산이’가 있고 텃밭이 꽤 넓어 보이지만 본격적인 규모의 농사를 짓기에는 부족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농사 자체가 주목적은 아닌 셈일 것이다. 방 수녀님, 뽈 수녀님, 그리고 세 분 수녀님까지 총 여섯 분이 생활하신다고 한다. 친정어머니가 챙겨 주듯 상추랑 얻어서 출발했는데 아뿔싸! 순례 책자가 든 작은 가방을 놓고 오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 25일 나 혼자 집사람이 구워준 바게트 빵을 들고 왕복 100킬로 이상을 다시 갔다 올 수밖에 없었다. 내일 다시 마지막 일정을 떠나야 해서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이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시간이란 선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현재일 수도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처럼 말이다. 현재만이 존재한다. 경험하는 모든 것에서 왠지 기시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서로 얽혀 있다. 아무리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양자 얽힘처럼 이것이 저것과 맞물려 파동을 이루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수녀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우리는 하늘 아래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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