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양업 신부의 흔적을 따라가기
지난 5주간 발이 묶여 있었더니 집사람도 나름대로 긴장하면서 지냈던가 보다. 희망의 순례자 책자를 따라 순례하려는 계획을 실천하자고 제안을 하고 대구 처형댁에서 하루 잘 수 있도록 미리 전화를 해둔 모양이라 얼떨결에 지난 16일 월요일에 가장 멀리 있는 순례지인 울주의 죽림굴을 향해 출발했다. 모든 일은 처음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그 자체의 관성을 바탕으로 흘러가게 된다. 죽림굴은 행정구역상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속하며 경주시 산내면과 접해 있다. 영남 알프스로 알려진 가지산, 신불산 등을 접하고 있고 도로변에 있는 사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무려 왕복 6.7km 거리를 트레킹 삼아 임도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비도 오락가락하고 습도도 높아서 이번 성지순례 2박 3일 일정 중에서 가장 난도가 높은 곳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갇히다시피 한 내게는 아주 좋은 치료의 시간이었다.
이 순례는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적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으로 그 관할 구역과 이동 거리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그 무엇이 아닐 수 없다. 땀의 순교자. 사람이 한 번 죽는 것도 어렵지만 11년에 걸쳐 모든 생명력을 오롯이 바치는 것 역시 백색 순교가 아닐 수 없다. 차로 이동하는 거리로도 먼 이 거리를 오로지 두 발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 다니며 사목을 했다는 것은 엄청난 긴장과 피로의 나날이 아니었을까. 길 위의 순교자. 배티 성지에 세워진 동상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한 일이다. 죽는 것도 올바르게 사는 것도 참된 신앙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도 모두가 그러하다. 후배 선생님의 부군이 암투병을 하고 있기에 그 지향을 두고 가는 길이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뜻에 달려 있을 터이다. 죽음은 언젠가 우리가 마주해야 할 일이다. 그 너머를 꿈꿀 수 있기를 희망하며 지금 이 길을 가는 것이 우리 영혼의 자세에 변화를 가져오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죽림굴은 신불산 깊은 곳에 있는 작은 굴인데 이 근처에 대재 공소를 유지하고 살았던 교우들이 포졸들의 출현 시 피난하던 곳이라고 한다. 세상의 권력이 금지하는 신앙을 목숨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숨고 학대당하면서도 그 믿음 때문에 살고 죽었다. 얼마나 간절한 믿음인가. 지금 내가 지니고 있다는 이 알량한 믿음과 비교하면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부끄러울 뿐이다. 죽림은 대나무숲이니 근처에 조릿대가 많았던 모양이다. 여기는 부산교구 관할이다.
죽림굴 성지를 떠나 대구교구 관할인 진목정 성지로 갔다. 우리말로 참나무골에 해당하는 지명이다. 성당과 피정의 집 등 성지 개발과 관리가 비교적 잘 되어 있는 성지로 보인다. 성당의 돔 모양의 구조가 인상적이다. 순교자의 무덤이 성지로서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자손들이 조상을 섬기는 그 정성도 지극한 바 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 상태가 지속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교회가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그 마음은 일반적인 기념 행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점이 있다. 현실에서 무명으로 비참하게 짓밟히듯 죽어간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도 잊히기는커녕 뼛조각 하나까지 수습되고 행적은 기억되고 기도와 믿음의 전승과 전례 속에서 생생하게 부활하는 삶을 예증하고 있다. 이는 신비로운 일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이 전해지는 어디서나 잊히지 않고 기억되듯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버린 사람들의 행적은 부활하는 삶에 대한 희망으로 새록새록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그러하다. 신비로운 일이다.
진목정을 떠나 대구시 칠곡군에 있는 신나무골 성지로 갔다. 주차장에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이 새겨진 예수상이 팔을 벌리고 맞이한다. 이 성지는 대구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한 곳이라는 것이 핵심이고 한티성지로 이어지는 순례길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도 비교적 잘 정비가 되어 있다. 선교사인 로베르(김보록) 신부님의 사제관이 있던 자리에 복원된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금이야 교세가 확장되어 교구별로 자치를 하고 있지만 조선대목구 시절의 가톨릭은 정말 전국이 하나의 선교 지역이었다. 게다가 현실의 정치권력이 죽음으로 금지하고 있는 상황이라 목숨을 건 선교와 믿음이었다. 우리의 경우는 얼마나 절실한가. 일본 가톨릭의 박해 상황과 후미에 역시 신앙의 자유 이전의 절박한 선교 시대를 기억하게 하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겠다. 진목정을 돌아보고 대구 처형댁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인 17일 화요일에는 처형이 싸주신 김밥과 간식을 챙겨 조금 이른 시간인 7시쯤에 진밭들 성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오늘은 무려 7곳을 들린 후 대천해수욕장에 있는 숙소에서 잠을 자기로 예약되어 있다. 이동할 거리가 짧지 않다. 진밭들 역시 교우촌 터인데 개인 사유지 입구에 표지만 되어 있고 성지로서의 다른 시설은 없다. 진밭들 성지에서 돌아 나오다가 금산 추부 깻잎을 한 상자 사서 차에 실었다. 깻잎 출하를 위해 가게 앞에 쌓아둔 상자를 보고 집사람이 관심을 보이길래 가격을 물어보고 무조건 사라고 했다.
오두재 역시 교우촌에 해당하는 장소인데 전주교구에서 성지 관련 안내 표지문을 제작해 세워두었다. 오두재 근처 ‘라온’이라는 베이커리 커피집이 전망도 좋고 해서 음료와 빵을 구매하고 양해를 얻어 싸 온 김밥을 야외 테라스에서 먹으면서 쉬었다. 건물이 아주 시원하고 조경이 잘 되어 있고 저수지를 끼고 있는 주변 풍광도 한몫해서 사람들이 많이 찾을 것 같았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군산 고군산군도와 이어져 있는 신시도 표착지였다. 프랑스 함대의 통역으로 고국을 찾았다가 배가 좌초하여 한 달가량 머물렀던 신시도는 성 김대건 신부님의 용수포구 표착 상황과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준다. 전주교구에서 설치한 기념 표지판은 신시도에 있는 새만금방조제 기념탑의 뒤편 울타리 너머에 있다. 삶의 흔적들. 그 흔적을 찾아 떠나는 순례. 무엇이 사람들을 그리고 나 자신을 이 자리로 불렀는가. 깊이 생각할 일이다. 공허한 곳들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 것인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목자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양 떼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 결정할 필요가 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내 영혼아.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불무골인데 여기도 전신주에 안내 표지판만 간단하게 있는 곳이다. 교우촌이 있던 자리라는 의미다. 희미한 흔적이라도 그 지점을 찾아내고 기억하는 행위가 그곳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화되면 우리가 가는 곳이 모두 성화될 터이므로 세상은 변화할 것이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기억하자.
불무골 교우촌 터와 달리 산막골은 성지로서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역시 사목과 관련된 교우촌이었을 테지만 피정의 집과 사무실 등이 자리하고 있다. 선교사들과 방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님의 어깨에 올려진 선교 사명의 무게가 성지를 순례하는 동안 새록새록 다가온다.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과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없이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일은 근본적으로 없다. 그러니 겸손할지어다.
그다음은 도앙골인데 여기는 기본적인 부지는 성지 관리의 목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큰 비석에는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라고 새겨져 있다. 야외 제대용 반석도 있다.
날이 점점 저물어가고 마음은 다소 조급해지지만 삼십칠 년 전쯤에 서울 6지구 청년연합에서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 개발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기억을 회상하며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에 도착했다. 신월동 성당 소속으로 대학 1학년 때인 86년인가 다음 해인 87년인가 여름으로 기억한다. 당시 우리가 한 일은 주차장에서 줄무덤까지 길을 닦고 14처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당시 설치한 14처는 항아리 모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초를 타설할 위치를 정하고 받침 부분을 콘크리트로 부어선 만드는 작업을 했고 대나무 숲 옆의 폐가에서는 취사반이 밥을 했고 포클레인을 끌고 왔던 김 로고 형님은 대단한 일꾼이었다. 모기한테 뜯기면서 천막에서 며칠 동안 자면서 우리가 한 일을 기억한다. 청춘의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는 날들이었다. 어떤 학사님은 ‘예수님 빤스는 튼튼하지요. 이천 년 입어도 끄떡없지요’라는 개사곡을 불러 우리를 웃게 했던 그런 기억도 있다. 아름다운 젊은 날의 추억이다.
주차장 위치는 그대로이고 바위 곁에 감나무가 있던 것도 그대로 남아 있다. 바위에 덩굴이 덮여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 바위였다. 식사 후 그늘에서 쉴 때 거기 올라가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감나무는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연못이랄까 저수지가 있던 자리는 메워서 정원과 성당을 지어 전국적으로 보아도 손꼽을 만한 성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줄무덤까지 올라가는 길이 전에는 상당히 멀어 보였는데 지금 다시 올라가 보니 그리 멀지 않다. 대나무밭도 여전히 그 위치에 우거져 있고 조금 올라가니 순교자의 죽음과 부활을 표현한 조형물이 있고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각 처의 구조물은 돌에 동판의 형태로 바뀌어 있다. 지금의 모습이 더 좋아 보이기는 한다. 모기에게 한 방 물리고 가려운 부위를 긁으면서 줄무덤에 도착하니 예전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곳은 가끔 꿈에서도 아련하게 나타나던 곳이다. 많은 추억과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기억날 듯 아련하게 묻어 있는 곳이다. 청양 다락골 성지는 나와 무관한 곳이 아니다. 근처에 최양업 신부님의 탄생지가 있다. 다음에 대천에 오게 되면 꼭 다시 여기를 들러야겠다.
다락골 성지에서 대천해수욕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대천 수산물센터에 들러 갑오징어 광어를 섞어서 매운탕거리와 함께 포장해서 숙소인 하하 펜션에 도착했다. 저녁으로 낮에 산 깻잎과 회를 먹고 매운탕 국물도 곁들여서 먹으니 하루가 만족스럽게 마무리된다. 저녁을 먹고 바닷가로 나가보니 9시가 넘었음에도 젊은 사람들 위주로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제 슬슬 여름 성수기가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대천해수욕장은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보인다. 집사람과 손을 잡고 바닷가 백사장을 길게 왕복을 한 후에 숙소에 들어와서 잠을 청했다. 고단하지만 보람이 있는 날들이다.
오늘은 성지 순례 셋째 날이다. 이제 서울 방향으로 조금 가까이 가는 여정이다. 우선 남방재 성지를 찾아 떠났다. 여기도 교우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지가 잘 조성되어 있다. 주차장이 크지는 않고 대형 차량이 접근하기도 어려워 보이기는 하지만 성지 자체는 의미 있게 꾸며져 있다. 순교자의 삶을 본받는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지만 그런 마음을 기억하고 하느님이 자비를 청하는 것은 우리를 이 덧없는 세상에서 희망하는 사람들로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영원한 것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마련이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천안의 성거산 성지다. 초입에 성당이 있고 여기에서 한참을 더 올라가서 새로 지은 성당이 따로 있다. 산이 생각보다 가파르고 험하다. 성지를 다니면서 생각한 것인데 세상에서 용납되지 않는 것을 간직하고 살려니 산속 깊이 숨거나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권력이나 부, 명예를 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는 셈이다. 여기 산속 깊은 곳에 교우촌의 터가 있고 순교자들의 줄무덤이 있다. 지금 600만 명에 가까운 신자가 있고 세계적으로도 활력이 있는 교회로 주목받고 있는 한국천주교회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결국 이들의 삶과 희생이 열 배, 백 배, 천 배의 결실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성령강림대축일에 뽑은 성령 7은 중의 하나인 ‘효경’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자녀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효경의 행위는 무엇이어야 할까.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멍에목 성지를 향해 성거산을 되돌아 내려가면서 보니 목천 나들목이 멀지 않다. 즉 독립기념관이 근처라는 말이겠다. 작년에 여기에 와서 순댓국을 먹었던 기억이 문득 났다. 그래서 점심을 우렁쌈밥으로 먹고 가기로 했다. 점심을 든든히 먹은 후 충청북도 보은의 속리산을 향해 간다. 이동 거리가 꽤나 멀다.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듯이 가다가 우측으로 갈라져 산속으로 들어가니 저수지랄까 호수랄까 할 만한 물을 끼고 한참을 오른다. 여기는 또 청주교구 관할이다. 주차장과 성당 피정의 집이 작정하고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부지를 충분히 확보한 것처럼 보인다. 이곳 성당의 모습이 인디언의 텐트처럼 생겼다. 얼마 전에 행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안내 현수막을 보니 며칠 전에 해당된다.
다음은 전에 한 번 학교에서 성지 순례로 갔던 기억이 있는 배티성지를 향했다. 이곳은 진천 백곡면에서 안성으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 있다. 여기는 예전부터 성지로 잘 알려져 있어서 넓은 주차장과 큰 성당 그리고 산을 오르면서 성지가 이루어져 있다. 또 최양업 신부 관련 기념관이 잘 관리되어 있다. 최양업 신부님의 행장 차람의 동상이 길 위의 사목자로서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며 산길에 세워져 있다. 순교 현양비와 형구로 쓰인 석물을 지나면 앞서 얘기한 옛 성당 신학교와 최양업 신부 박물관이 나란히 있다. 길가의 접시꽃이 한창 피어 있다. 삶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믿음이란 또 어떤 것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시절을 살아가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많은 사연과 기억들이 사적으로 공적으로 남겨지는 것일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모든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당신 앞에는 시간도 없고 영원만이 있을 뿐입니다. 저희들은 당신 눈앞에 있나이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 이제 오늘의 마지막 목표인 봉암 성지다. 배티고개를 넘어 안성을 지나가다가 안성맞춤 나들목에서 다시 음성군 맹동면에 있는 성지다. 근처에는 꽃동네가 있다. 순교자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어떻게 죽어야 영원히 살 수 있는 부활의 길을 가게 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죽어야 사는 이 역설! 그 역설을 살아내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일진대 오늘 우리의 날들은 어떠한가. 차로 달려도 이렇게 피곤하고 먼 거리를 두 발로 터벅터벅 걸었을 최양업 신부님을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 선교! 심장이 피곤에 지쳐 멈춘 그 지점에서 꽃이 핀다. 기억의 영원한 꽃.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신앙 선조들이 흘린 피와 땀과 노고는 땅에 스며들어 기름진 거름이 되고 교회는 겨자씨만 한 크기에서 온갖 새들이 깃드는 나무가 되었다.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삶을 희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