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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Dec 26. 2020

군고구마 궈 먹는 날

엄마 손 잡고

엄마에게 조금 있다 간다고 전화를 드리면, 그 순간부터 옷을 입고 기다리신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엄마 댁 앞까지 가기 전에는 전화를 하지 않는다.


오늘은 엄마께 설렐 시간을 드리고 싶다. 미리 전화를 드린다.


연말연시를 맞아 엄마를 모시고 시골의 농막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엄마는 부축해야만 겨우 걸으시는 정도다. 엄마를 보면 왜 그리 속이 상한지 모르겠다. 나의 미래의 모습이 될 것이라 생각되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이기적 유전자'인 나는 나 자신을 가장 불쌍히 여긴다. 엄마를 생각하면서 나를 생각하는 자신을 질책하며, 엄마 손을 잡고 농막 안으로 들어간다.


입구에 남편이 따 놓은 눈 맞은 홍시가 상자에 몇 개 있다. 엄마와 하나씩 먹고 들어간다. 농막은 전에 브런치 글에 있는 것을 설명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https://brunch.co.kr/@campo/35

엄마가 다슬기 수제비를 정말 좋아하셔서 맛집에서 재료만 포장해서 가져왔다. 엄마의 다슬기 수제비 사랑과 관련된 이야기는 역시 지난 브런치 북을 소환해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나의 다슬기 탕 사랑이 엄마로부터 비롯되었음이 입증된다.

https://brunch.co.kr/@campo/4

엄마께서 어찌 맛있게 드시는지 사진으로 남길 사이가 없었다.

에취!

매운 것도 잘 드시던 엄마는 몇 년 전부터 잘 드시지 못하신다. 그러고 보니, 청양고추가 들어가 조금 얼큰하다. 그래도 수제비를 정말 좋아하셔서, 나머지는 맛있게 잘 드신다. 원래 나의 엄마는 미식가시다. 입맛이 몹시 까다로우신데, 오늘 다슬기 수제비는 만점이다. 다행스럽다.

엄마가 매운 것을 거의 드시지 못하셔서, 보리비빔밥은 내가 맛있게 먹었다. 나도 더 나이 들기 전에 매운 것도 맛있게 실컷 먹어야겠다. 사실 엄마는 다슬기 수제비를 드시고 싶어서 보리비빔밥으로 뱃속을 채우시고 싶지 않은 눈치셨다. 보리비빔밥을 먼저 드리고 수제비 반죽을 떼 넣는데 엄마가 계속 침을 꼴깍하시는 것이 보였다.

농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구다. 고구마 구워 먹는 역할이자 통나무 집을 따뜻하게 해 주는 훌륭한 난로다.

배부르시다던 엄마는 군 고구마를 까 드리는 족족 다 드신다.

이것 참 맛있다!

그렇게 몇 개의 고구마를 연거푸 드셨다. 자, 이제 엄마와 추억이 어린 내 글을 읽어드려야지 싶었다. 그런데 엊그제 기가 지니를 연결해 프로그램이 다양해졌다면서 남편이 TV를 틀어드렸다.


엄마가 좋아하시는 트로트 방송이다. 에잇, 트로트에게 내 글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오늘도 읽어드리지 못했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읽어드리자니 너무 쑥스러웠는데 잘 되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나무를 나무꾼처럼 잔뜩 잘라 놓았다. 장작더미가 풍요롭게 보인다.

농막에는 봄이면 쑥이 가득하다. 20년 동안 한 번도 농약을 치지 않은 땅이기에 더 마음 편히 캔다. 지난봄에 엄마와 쑥을 캤다. 걷기도 힘든 양반이 주저앉아서 어찌나 재밌게 쑥을 캐시든지, 마치 어린아이가 된 모습이셨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의 한마디가 나를 조금 슬프게 한다.

내년 봄에 쑥을 캐러 올 수 있을지.

내가 쑥을 미리 자라게 할 수도 없고 엄마가 봄까지

건강하시기를 빌뿐이다.


https://youtu.be/eRNTzEv5svk

농막에서 군고구마 구워 먹는 날

https://brunch.co.kr/brunchbook/luc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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