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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Dec 30. 2020

퇴근하자마자 막걸리를 마시는 이유

2021년에는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기를

어젯밤 눈이 오기 시작했다. 첫눈이라 설레었고 추운 줄 모르고 예뻐서 눈이 오는 골목길을 찍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슬그머니 다음날 출근길이 걱정이

되었다. 꿈을 꾸었다. 뭔가가 나를 눌러서 소리를 지르다 깼다.


어제 눈 내리기 전 비가 왔었다. 그 위로 눈이 내렸고 영하로 뚝 기온이 떨어지니 길이 미끄러웠다. 벌벌 떨면서 운전해서 출근했다.


대부분 직장은 연말에 화장실 갈 사이 없이 바쁘다. 나 역시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요즘 라캉에 관한 책을 읽는 중이다. 직장에서 읽을 시간이 없음에도 책을 들고 출근했다가 그대로 들고 퇴근한다.

노트에 적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노트도 함께 들고 다닌다. 그런데 직장의 내 탁자 책꽂이에 있는 책들이 눈에 보여 쓸어 모아 쇼핑백에 넣는다. 쇼핑백 맨 위에 핸드폰을 얹었다.


직장의 다른 동료 사무실 앞에 쇼핑백을 두고, 잠시 옆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온다. 정말 오늘 화장실 갈 사이도 없었다. 왜 이리 바쁘게 사나 모르겠다.


집에 와서 책을 모두 꺼내 책상에 올려놓는다. 너무 배가 고파서 배추와 깻잎, 양파, 청양고추를 잘게 썰어 넣고 배추전 하나를 부친다. 생각해보니 오늘 점심도 못 먹었다. 라떼 한잔과 달달한 던킨 도너츠 하나가 전부였다.


습관적으로 브런치 피드를 보려고 핸드폰을 찾는다.  그런데 핸드폰이 보이지 않는다. 내 팔에 찼던, 나에게 가장 중요한 아이폰 워치도 사라졌다. 아니,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가. 분명히 손목에 차고 있었다. 워치가 중요한 것은 핸드폰의 위치 추적 및 알람 기능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요즘 워치 끈이 느슨해졌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되돌아 가기 싫은 직장에 다시 갔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흘린 곳이 없다.

분명 그때 화장실 앞 복도 쇼핑백에서 누가 가져갔나 보군


혼자 중얼거리고 찾았지만 없다. 지난밤 꿈자리 탓을 하면서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워치를 찾는다. 아니, 이런...... 정말 엉뚱한 곳에 있다. 화분 옆 구석에 왜 거기 벗어 놓았단 말인가. 지금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치매와 건망증을 구분 짓는 것은 생각이 나고 안 나고의 차이라 한다. 뒤늦게라도 생각이 나면 건망증이란다. 나는 스스로 한탄하고 자책한다.


이제 워치를 찾았으니 핸드폰이 어딨는지 울려본다.


아, 맑고 곱게 울려 퍼지는 나의 핸드폰 소리!

바로 노랑 책과 노랑 노트 사이에 끼어있는 나의 연노랑 고무 케이스의 핸드폰을 꺼낸다. 이럴 수가.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 있다니.


소리가 나서 들춰본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내 핸드폰을 숨겼다.

누군가 이 사진은 어떻게 찍었냐 묻는다. 사진은 아이패드로 찍었다.

이렇게 색이 비슷비슷한 데다가 고무라 안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쯤 되니, 기쁨과 함께 자괴감에 몰려온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늘 찾고 또 찾고. 엔트로피 법칙으로 보면 쓸모없는 인간이다. 생산성이 적고 소모적이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다. 나는 인생의 반을 물건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다. 그래서 딸이 워치를 사 줬는데 그 워치를 아무 데나 풀러 놓아서 또 말썽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식은 배추전이지만 허겁지겁 입에 넣고, 따끈하게 김치전 하나 더 부친다. 김치전 사이에 치즈를 듬뿍 올려 본다. 이를 반으로 접는다. 이탈리아 돈가스처럼 이탈리아 김치전을 만든다. 혼자 만들고 사진을 찍다 보니 살짝 조금 탄 경향이 있다. 아직 먹기엔 나쁘지 않다.

사이에 치즈가 터져 나온다. 나 혼자 먹으니 어떤가. 처음에는 모양새가 좋았는데 다른 안주를 준비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다른 안주란 위쪽에 보이는 황태 구이다. 일찍이 신혼초에 나는 마요네즈, 매실청, 간장, 청양고추를 넣어 특별 소스를 만들어 먹었다. 황태 구이와 환상의 소스다. 그때가 벌써 30년 전이다. 그 후, 특별 소스가 있다는 곳에 가니 바로 내가 해 먹었던 소스다.

오늘 나는 자책과 동시에 나의 창의력을 이야기한다. 이렇게나마 조금 나를 위로해 보는 것이다.


내가 정리라는 것에 젬병이란 것, 건망증이 심하다는 것, 너무 직언을 해서 곧바로 심하게 후회를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은 바로잡아야 할 나의 못된 습관이다.


다른 분의 경험을 거울 삼아 노트북 테이블로 안주와 술잔을 옮기면서 노트북을 치운다. 찬찬 치 못해 흘릴 것만 같아서다.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에서 일어서다가 바로 흘렸다.

노트북을 옆으로 치운 것은 오늘 하루 중 제일 잘한 일이 되었다.

핸드폰으로 글을 쓰면서 마시면서 하다 보니 이제 한 점 남았다. 남은 술은 황태 찍어 먹어야겠다.


2021년에는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았으면 좋겠다.


안녕, 2020.

안녕, 2021.

어서 와, 2021.


https://brunch.co.kr/brunchbook/luc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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