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상황이 만든 사랑
독서 모임에서 <닥터지바고>나 <테스> 그리고 <레베카>나 <죄와 벌>과 같은 고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결혼한 한 여자로서 나이 든 인생의 경험자로서, 다시 읽고 보게 되는 소설과 영화는 그 느낌이 자못 다르다. 최근 추억의 명화 감상이나 소설 읽기에 빠져 있는데 마침 EBS 채널에서 닥터지바고를 방영했다.
<닥터 지바고>는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로부터 시작되어 '볼셰비키 혁명'의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따뜻한 인간애를 잃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이다.
처음 이 영화를 접한 것은 중학생 시절이었다.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기 전 시골 우리 집 책장에서 소설 <닥터지바고>를 읽으려고 시도했다 그만 포기했던 책이다. 아버지가 대학시절 읽으셨다는 데, 너무나 낡은 책으로 세로로 인쇄된 데다가 유리안드레아비치 어쩌고 저쩌고 하는 긴 이름들 때문에 읽기에 몰입하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여중고 시절의 나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접하게 된 이 소설의 첫 부분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소설에서는 곧바로 어머니의 장례식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영화가 극장가에서 상영된다는 것을 알고 세기의 명화라고 주워들은 것과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되었던 소설 속 유리라는 소년의 인생이 궁금했기에 영화로라도 보고 싶었다. 그때 당시에는 학교에서 보라고 하는 영화만 볼 수 있었던 시대여서 교칙을 위반하고 몰래 영화관을 갔다. (세상에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본 후,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에도 불구하고 무척 화가 났다. 유리와 라라의 사랑은 불륜이고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며, 결국 아내가 아닌 라라를 택한 유리 안드레아비치 닥터 지바고에 대해서 너무나 실망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죽어간 유리가 안쓰럽다거나 라라와 유리의 사랑이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일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그때 나는 공명심이 불타오르고 흑백논리에 의해서만 생각을 정리하는 타협할 수 없는 청소년이었다. 그래서 <감이 익을 무렵>과 같은 소녀 감성 팍팍 나는 종류에 열광했었다. 그러니 라라처럼 어머니의 정부와 육체적 관계에 빠진다거나 남의 남편과 정을 나누는 여자를 도대체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오늘 다시 본 추억의 명화 <닥터 지바고>는 완벽하게 새로운 감동을 주었고 심지어 가슴이 저리는 아픔을 느끼게 했다.
강하고도 부드럽고 한없이 넓은 마음의 소유자 사샤, 매력적이고 강렬한 흡인력을 지닌 해바라기 같은 여자 라라. 그리고 냄새나는 열차 안에서도 창 밖으로 난 하늘의 달과 구름을 보고 미소 짓고,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처럼 끝없이 펼쳐지는 눈길을 걸으면서도 하늘에 가려진 달을 바라보는 닥터 지바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 닥터지바고는 여복이 많은 사람이다.
라라는 열여덟 순진한 나이에 어머니의 정부, 코마로브스키에게 잠시 마음을 주었던 이유로 인해 그에게 정조까지 빼앗겼으니 고결하지 못한 것일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로테처럼 결코 허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끝내 자기 자리를 지켰던 여자만을 고결하다고 할 수 있는가?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으니 나쁜 여자일까? 코마로브스키는 라라에게 '매춘부' 또는 '고결하지 못한 여자'라고 외친다. 자신에게 쉽게 넘어왔다는 점에서 매춘부가 되고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했기에 고결하지 못한 여자가 되는 것이다.
<닥터 지바고> 속 남성들은 라라에게 하나같이 비열하고 비겁하며 나약하다. 심지어 유리까지 말이다. 코마로브스키는 야비하고 짐승적인 추악함의 전형이고, 라라의 남편 파샤는 그 자신의 광기에 빠져 인간애를 잃는다. 닥터지바고 역시 유부남이면서도 라라에게 먼저 사랑 고백을 한다.
그러나 유리 안드레아비치 닥터 지바고를 나무랄 수가 없다. 그 역시 라라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토냐에게 돌아가려고 라라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바리끼노를 향하던 중 공산당에 체포되고 운명이 그를 다시 라라에게 이끌게 되었으니 말이다.
라라와 함께 바리끼노에서 머물면서 유리는 열정적으로 시를 쓴다. 그가 지은 시 "라라"의 시귀가 낭송되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에요."라고 말하는 라라의 대사에서, "아니야 이건 당신이야."라고 응답하는 유리의 대사에서 유리가 라라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졌을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추구하는 '개인성의 말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밑바닥 감성을 내던지지 않고 버텼던 시인 닥터 지바고는 고결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노란 수선화가 자유롭게 평원을 가득 채운 바리끼노... 유리의 마지막 무덤가에도 역시 수선화가 놓인다. 중학시절 영화를 볼 때 노란색만 기억에 남아있어서 해바라기였던 것으로 착각을 했건만 오늘 다시 영화를 보니 수선화였다. 알고 보면 나의 잘못된 기억 속 해바라기는 얼토당토 한 것이다. 배경이 흰 눈이니 이른 봄 피어나는 수선화가 맞다. 수선화의 꽃말은 '고결함', '자존심' 등이다. 라라는 해바라기만큼 생명력 있고 강한 매력을 지녔으며 수선화처럼 자존심 강하고 고결한 여자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가치관이 바뀐 것 같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 색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라라와 유리의 사랑이 가슴 아프다. 소설로 다시 읽어보고 싶다. 그러나 영화가 명화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음악과 배경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강하게 나를 이끌고 잠을 못 이루게 한다.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 있는 동영상을 링크한다.
하나는 포로가 된 주인공이 끝도 없이 펼쳐진 눈길을 걸으며 남긴 발자국이다.
다른 하나는 떠나는 라라의 썰매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서둘러 달려간 이층 창문. 열리지 않아 성애를 긁어보지만 안된다. 결국 창을 깨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