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밤의 단상>

by 김상래

신랑에게 주는 15주년 선물

며칠, 아이와 빈둥거리며 놀았다. 놀 땐 글도 쓰지 않았다. 삶에 있어 빈 공간도 필요하니까. 꽉꽉 채울 수밖에 없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그 시간 덕분에 지금 쉬는 시간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또 감사함으로 다가오는 것같다. 신랑은 공부를 잘했다. 장학생으로 법대에 입학했고 그 어렵다는 법대 기숙사까지 들어갈 정도로 꽤나 스마트한 사람이었다. 아빠는 그가 변호사가 되길 바랐고 나는 그 긴 시간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서른 중반, 적지 않은 나이였고 연애 기간으로 이미 3년을 함께 했다. 나보다 4살이나 어린 그가 취업이라도 해야 떳떳하게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금융회사에 취업을 하고 회사에서 받은 면접비로 아빠에게 술을 샀다. 결혼 후의 계획에 대해 여러 장으로 자료를 만들어서 아빠에게 보여 드렸다. 우리는 그렇게 결혼을 했다. 무에서의 시작이었다.


결혼 후 다음 해에 아이를 낳았으니 올해로 신랑이 한 회사에 다닌 지 15년이다. 아빠가 한 회사에 30년 근무한 것을 두고 진심으로 존경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신랑이 그 절반을 해낸 셈이니 대견하고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2년간은 대학원을 다니며 성적 우수자로 졸업을 했다. 통 크게 선물하자 싶어 백화점을 찾았다. 15년 고생한 것에 비하면 작은 선물이겠지만 이런저런 우여곡절 다 겪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인생 2막에서 내가 직접 번 돈으로 척! 하고 원하는 걸 현금으로 사주고 나니 뭐하나 제대로 준 것 같아 기분이 썩 괜찮았다. 매일 4시간씩 출퇴근으로 시간을 쓰는 신랑. 잠신이란 별명으로도 살아온 사람이 새벽잠을 줄여가며 15년 고생을 한 덕에 가족이 모두 안정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여유 시간이 생겨야 감사한 마음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이 시간에 또 감사하다. 아빠처럼 그렇게 성실하게 꾸준하게 그 긴 시간을 묵묵히 걸을 신랑을 위해 나도 열심히 내 일을 해야겠다. 하고 있다.

여행 계획, 전시투어

신랑에게 겨울 옷을 하나 사 주고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으러 갔다. 나는 작고 알차게 맛있는 걸 좋아하는데 강릉의 허스크밀에서 만난 오렌지 무스처럼 OPS의 에그조띠끄가 좋다. 신랑 선물 사주고 커피 한 잔과 함께 먹은 에그조띠끄 덕분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런 작디작은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그거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진다. 엄마는 아빠와 여행을 많이 한 게 가장 좋았다고 한다. 이제는 오래 걸을 수 없어 그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에겐 아끼지 말고 한살이라도 젊을 때 여행을 많이 다니라고 한다. 아마도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우리가 여행 간다는 말일 거다.


돈은 나이 들면 다 모이게 되어 있으니 너무 돈돈하지 말고 너무 아끼지 말고 두 다리 성할 때 실컷 더 많은 곳을 다니라고 한다. 아이 어릴 땐 1년에 두 번은 해외여행을 갔던 것 같은데 기타 학원도 빠지면 안 되고 친구랑 운동도 해야 하는 성실한 아이 덕분에 해외여행이 쉽지 않다. 여름 즈음 다시 한번 계획을 세워 보기로 하고 밀린 숙제하듯 전시회 나들이를 위해 서울에서 며칠 묵을 계획을 짰다. 작년엔 그 좋아하는 문화 예술을 위한 시간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올해는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가족과 함께 전시투어로 새해를 맞이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림을 보고 또 글을 쓰고 공부를 할 계획이다.


나는 가족 안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문화 예술을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전시회도 가고 음악회도 가자. 올해 우리의 계획은 가족이 친하게 지내는 거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모두 잘 안다. 2025년 건강 안에서 가족의 화목이 우선순위다. 그리고 책 두 권. 나머지는 모두 보너스!


아이와 함께 만드는 시간, 환혼

아이와 1부, 2부를 보고 다시 1부부터 정주행하고 있는 드라마, 환혼. 한때 무협지에 빠져 살던 때가 있었는데 이 드라마는 무협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아 흥미진진하다. 캐릭터 설정도 좋고 대사도 괜찮다. 무덕이와 장욱의 대사들이 센 편이긴 하지만 뭐, 청춘일 때는 그런 게 또 매력적이니까. 한 번 본 드라마를 다시 볼 정도로 또 봐도 참 재미있다.


사실, 드라마를 보는 것도 좋지만 아이와 함께 공유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더 좋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 옆에 앉은 아이가 왼손이 아프다며 주물러 달라고 했다. 아이 손을 주물 거리며 같은 장면을 보며 서로 낄낄대고 웃고 꽁냥거리는 장면에서 부끄러운지 슬쩍 자리를 뜨는 아이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꼬맹이가 언제 저리 큰 건지 웃음이 나기도 하면서 말이다. 요 며칠은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함께 빈둥거리며 놀았는데 나는 이것도 채질인듯싶다. 놀 때는 노는 게 좋고 일할 때는 일하는 게 좋고 글 쓸 때는 쓰는 게 좋고. 인생이 뭐 별것 있나. 저 위에 있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사는 것보다 매일 무얼 하는지 알면서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일은 아이와 함께 운동을 하고 글을 쓰고 아이를 학원까지 바래다주고 또 돌아와 함께 식사를 하고 환혼을 보고 책을 읽고 또 글을 쓸 거다. 그렇게 무언가를 하는지 아는 삶을 살아갈 거다. 이거면 되지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국수를 좋아하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