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오전, 고요한 들뜸 속으로
어쩐지 주말 같은 오전. 아니나 다를까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오전은 들뜸이 다른 날보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것 같아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런 어둑하고 축축한 날씨엔 거실 등을 켜지 않고 노트북의 빛만 의지에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온종일 한자리에 앉아 자판 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날이다. 내일 강의를 위해 어디 한적한 스터디 카페를 찾아 들어가 볼까도 싶다. 세상의 소음이 모두 땅속으로 숨은 것 같은 이 나지막한 적막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다. 깨고 싶지 않은 묵음 속에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시간을 이어가고 싶다. 앗, 아이 깨울 시간이구나.
국회도서관에서의 첫 회의, 설렘과 만남의 기록
국회도서관 다녀온 일은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만보 이상 걸었으니 운동량도 꽤 되었다. 오래간만에 살짝 덥다고 느낄 정도로 날씨도 좋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도 없이 모든 게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국회도서관 편집실무안건에 대해서는 매달 메일로 그 내용을 보내다가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처음. 나는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을 좋아한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고 본 적도 없는 무언가와 어떤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에 긴장감보다는 신나는 감정이 더 먼저다. 장소를 제하고는 모두 처음인 날. 총 10명 중 일면식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나머지 9명은 모두 처음. 돌아가며 회의 안건에 대해 발표를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내가 첫 타자였다.
회의 주제를 제도, 현장, 이론으로 잡고 도서관, 미술관, 예술가의 기록이 만드는 '기억'에 대해 다뤄보고 싶다고 했다. 그에 맞는 필진을 여럿 추천했는데 국장님이 마음에 들어 하셨다. 너무 딱딱한 주제보다는 여름에 가볍고 활기차게 다가올 수 있는 주제 선정에 힘을 실어 주셨다. 아무래도 이번엔 내가 택한 주제와 추천한 필진이 선택되었으면 싶은 마음에 나름 열심히 자료를 찾아 안건을 만들었다. 이어 추천한 생태전환도서관, 기후리터러시 관련 전문 영역에 있는 필진 추천도 마음에 들어 하셨다. 안건을 발표하며 "이번에는 채택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에 열심히 자료를 찾아 만들어 보았습니다."라고 언급한 부분 때문인지 국장님이 힘 있는 목소리로 도서관과 예술이 접목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국회도서관이라 회의가 딱딱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은 국장님이 계셔서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굵직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이끌고 있어서 멋있는 사람으로 다가왔다.
회의는 한 시간을 훌쩍 넘겨 끝이 났다. 미리 예약을 해둔 국회의정당의 한 레스토랑으로 모두 움직였다. 아침에 집에서 출발하며 ABC 주스 하나를 마시고 국회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같은 주스 하나를 더 마셔서 배는 고프지 않았다. 관심사가 비슷한 분들이 모이니 할 얘기가 무궁무진했다. 국장님이 자신의 싸인본이 담긴 '도쿄 모던 산책'이라는 책을 선물로 주셨다. 책장을 넘겨 보니 일본의 여러 박물관, 미술관, 역사적인 장소의 기록을 정확한 연대까지 표시해 정보 에세이 형식으로 묶은 책이었다. 꽤나 탄탄하게 잘 만들어진 책이어서 책장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편집의 중요성이 책 한 권으로 드러났다. 함께 자리에 참석했던 **문고 부장님도 책이 짜임새 있게 잘 만들어졌고 구성도 좋다고 했다.
점심으로는 다양한 요리가 코스로 나왔는데 사실 그 시간에 밥 먹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간 내내 예술과 미술관, 도서관과 박물관, 책과 출판시장, 서점과 책 읽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밥을 어디로 먹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레스토랑의 내가 바라보는 벽면에 둥근달 항아리 작품이 크게 걸려있어서 눈과 귀, 입 모두 풍요로웠다. 이런 일이 일상이 되면 그걸 풍요라고 느끼지 못하겠지. 이따금 삶에서 만나는 이런 경험들이 살아있는 감각을 깨우고 세상의 모든 곳이 즐거운 놀이터란 생각이 든다. 좋아하는 것, 내가 재미있어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 발을 담가보면서 살려고 한다.
예약하기 어렵다는 국회의정당 **레스토랑에서 오찬을 마치고 좋은 기분을 실어 수원의 롯데백화점으로 향했다. 내가 좋아하는 상큼한 '에그조띠끄'를 사기 위함이었는데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원하던 것이 없었다. 달달한 망고 맛 대신 상큼한 오렌지 맛이 나는 '오렌지바바로와', 딸기와 블루베리가 얹어진 '샤를로뜨', 아이가 좋아할 만한 '상투 과자', '피낭시에 오 쇼콜라'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반나절 이상을 밖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은 에너지가 별로 남지 않는다. 한글을 열어 몇 자 적다 보니 금세 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단백질 우유와 빵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함께 수영 강습을 갔다. 나도 아이도 피곤한 상태라 어쩐지 다른 날 보다 더 더디게 가는 것만 같았고 물도 훨씬 더 많이 먹었다. 그럼에도 땡땡이치지 않고 강습 간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자고 했다.
소소한 풍요
중2 아이와 여전히 함께 나눌 이야기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삶은 만들어 가기 나름이다. 나이가 들면 예전 추억으로 산다는데 소소하게 함께 한 시간들이 많아 노년의 삶도 쓸쓸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날을 빼곡하게 쓰다 보면 지난 시간이 될 지금의 기록들이 나를 충만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믿는다. 집안일을 조금 해두고 세탁소에 가서 아이 운동화와 신랑 바지도 찾고 아이 하교하기 전 부지런히 내 일을 해보자. 내일 강의 준비, 나머지 시간엔 무조건 원고에 집중.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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