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eds assessment
삑.
아이디카드를 출입문에 대자, 문이 열렸다. 내가 방금 연 문이 닫히길 기다리는 동안, 앞문 키패드에 개인 비밀번호를 넣고 카드를 찍었다. 뒷문이 닫히자 앞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감옥처럼 이중문으로 되어 있는 911 센터 앞에 서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리드 분의 안내에 따라 오늘 나와 파트너가 되어 줄 911 요원 옆에 앉아 헤드셋을 연결했다. 때는 밤 7시 즈음. 자리에 앉자마자 캐나다 911 센터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911입니다. 어떤 응급 상황이 있으신가요?"
"저희 매장에 자주 찾아오는 부랑자가 있는데요. 이 사람이 오늘은 매장에 들어와서 손 소독제 병을 마셨어요. 지금 격리시켜 두었는데,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손 소독제?
순간 헤드셋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에 내 영어 리스닝 스킬을 잠시 의심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전화 내용에 눈도 깜짝하지 않던 911 요원은 재빨리 이전 기록을 찾으면서, 전화 내용을 확인하고, 응대를 하면서, 시스템에 해당 내용을 업데이트 함과 동시에, 다음 해야 할 일을 척척 해 나갔다. 눈앞에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펼쳐져 있는 양 쉼 없이 움직이는 타이핑 소리에 맞춰 그녀가 시스템에 기록한 "손 소독제"라는 단어를 보고 나서야 정말로 손 소독제를 마신 사람을 신고하는 내용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주변에 있는 경찰차를 보낼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무렇지 않은 듯 내 얼굴을 보며 자신이 하는 업무를 설명하면서, 정보를 기록하는 911 요원의 모습이 새삼 고맙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직무 교육 담당자인 내가 왜 캐나다 911 센터에서 이런 전화를 듣고 있었냐 하면, 그게 바로 내 업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이제부터 자세히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보통 북미에서 HRD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할 일이 많다. 전체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에 속해있느냐, 비지니스 내에 속해있는 교육 부서이냐에 따라 교육 대상자의 범위를 다를 수 있으나, 대게 HRD를 담당하는 사람의 업무 범위는 팀의 구성이나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의해서 정해진다.
이번에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컨설팅부터 디자인까지 모두 혼자서 책임지는 업무로, 911의 기존 직무 프로그램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든, 기존 프로그램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든 상관없이 HRD 담당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업무 중 하나는 '현 상태 점검' 및 '현재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다.
어차피 바꿀 건데 왜 기존 프로그램과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가 철저해야 하냐면, 모든 결과물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공무원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지 않는다. 따라서 현 상태의 장점 및 단점뿐 아니라 특정 교육 디자인으로 귀결된 이유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면 업무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수월하다.
만약 이 단계를 소홀히 하면 어떻게 될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프로젝트 데드라인, 예산, 윗선의 이해 부족 등) 어물쩍 '그래 결과물만 좋으면 됐지. 대충 훑어보고 내 기존 지식과 경험으로 (= 뇌피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겠지'라고 HRD 담당자가 착각하는 순간. 프로그램이 거의 다 완성된 단계에서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생긴다. 부실공사는 결국 건물이 무너질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그것을 문서화하고, 분석하면 된다. 말은 간단하지만, 실천에는 많은 요소가 필요한 일이라고 보면 된다.
이 교육은 왜 필요한가?
누구를 위해서 하는가?
현재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하고 있는가?
현재 어떤 콘텐츠를 사용하고 있는가?
교육 대상자가 현재 하는 업무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이 교육 대상자가 후임을 가르친다면, 어떻게 가르칠까? 교육받은 내용에 맞춰서 가르칠까, 아니면 실무에 맞춰 변형된 방식으로 가르칠까? 변형된 방식으로 가르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이 외에도 HRD 담당자가 물어야 할 질문은 산더미이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결국 현 상태를 점검하고, 현 상태에 이르게 된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 과정을 제대로 기록하고 분석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즉,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게 무엇일지 예측이 가능하고, 대략의 솔루션을 구상할 수 있으며, 그에 맞게 질문을 준비할 수 있고, 설득이 필요하면 설득할 데 필요한 정보와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다.
내가 911 센터에 밤이고 낮이고 방문해서 여러 계급의 911 요원들 옆에 앉아서 질문을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걸려온 전화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기록하고, 문서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바로 이를 위해서다. 이와 같은 업무 체험 (Job shadowing) 방식은 현 상태를 이해하고 기록하는 데 사용되는 여러 가지 방식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