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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 노마드 Sep 02. 2024

캐나다 911 2인자와 미팅을 한 이유

Needs assessment

후우.

한숨을 크게 쉬고 회의실 문 앞에 섰다. 캐나다 지방 911의 부본부장과의 (Deputy Chief) 첫 미팅이 잡혔기 때문이다. 첫 미팅에서 승기를 잡지 않으면 이번 프로젝트가 산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저절로 긴장이 됐다. '교육 프로그램에 관심이 없으면 어쩌지?'.'내가 하는 말에 사사건건 태클을 걸면 어쩌지?' 여러 가지 생각이 맴돌았지만,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이제 승부는 시작됐다.


북미에서 HRD에 몸 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겪을 법한 이 상황의 전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전에, 내가 이 회의실 문 앞에 서게 된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도시를 옮기면서 새로운 지방 정부의 공무원이 된 지 1년 여.

HRD업무 자체의 프레임워크는 비슷하다 보니 업무의 주제나 대상의 특수성에 의해서 일의 즐거움이 결정되는 데, 이번에 맡은 보직은 일의 범위가 너무 애매한 데다가 내 능력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사내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캐나다 공무원 이직은 사내 부서 이동이라고 하더라도 외부에서 지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이 이루어진다. 이력서를 제출하고, 시험을 보고, 인터뷰를 보는 등 모든 과정을 동일하게 진행한다. 그런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보직을 변경하고 싶었던 이유는, 역시나 일의 재미다.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되묻다 보니 어느새 내 손은 이력서를 수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식 인터뷰 전에 사전 인터뷰를 (pre-screening) 하자는 연락을 인터뷰 5분 전에 받았다. '뭐, 인터뷰를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내 길이면 열리겠지' 하는 편안한 마음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기도 전, 난 이 보직을 반드시 따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내 미래의 매니저가 될 사람이 업무에 대해 설명하는데, 911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 순간 내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무려 만든 지 15년이나 된 911 교육 프로그램을 리뷰하고, 새로 디자인할 컨설턴트를 구한다는 얘기였다. 우와. 911이라고? 시민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고, 누군가의 삶을 구해주는 그분들의 교육을 내가 담당할 수도 있다고? 누군가는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정말 바라지 마지않는 영광스러운 보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단단하게 마음먹고 임한 인터뷰에서 결국 그 보직을 따내게 되었고, 911 이인자와의 첫 미팅을 위해 노트북을 들고 회의실 문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이든, 기존의 교육 프로그램을 개선하는 일이든 필수불가결하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이 프로젝트를 스폰서 한 리더십 팀의 서포트와 재가다. 이 프로젝트에 돈을 쓴 사람이자, 때로는 나를 뽑는데 돈을 낸 사람, 앞으로 쓸 예산을 좌지우지할 사람의 지지와 허가가 프로젝트의 성패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사람을 한 번에 이해시키고 설득하지 못하면, (거의) 망한다. 나한테 두 번이나 회의 시간을 내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이 직급에서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패한다고 100% 망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게 좋은 성과를 내기 어렵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실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사내 교육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교육 프로그램이 아주 좋아도 대개는 이런 고정관념을 먼저 가지고 교육을 듣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교육을 들어야 한다고, 이 교육 프로그램을 개선하기 위해서 당신들의 의견과 참여가 필요하다고 설득할 리더십 팀이 없다면?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개선하는 이유가 바로 여러분이라고 외칠 리더십 팀이 없다면? 바로 망하는 지름길로 특급 열차를 예악 하는 셈이다. 결국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니까 만들게 된 프로그램으로 전락하기 쉽다.


HRD 커리어를 막 시작한 사람들은 '내가 교육 프로그램만 기똥차게 만들면 되지 리더십 팀의 지지가 (buy-in) 얼마나 큰 성패를 좌우할까'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프로그램과 리더십팀에서 생각하는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상대방이 꼭 필요로 할 때,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적재적소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리더십 팀의 비전을 이해해야 한다.


이게 바로 교육 프로그램 개발의 첫 단추다.



똑똑.

회의실에 들어가 처음 부본부장님을 만났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내가 왜 이 프로젝트에 진심인지 간단히 설명했다. 노트북을 열고, 준비해 온 간단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열었다.


프레젠테이션은 겨우 5장 남짓이지만, 이게 첫 단추다.

왜냐면 내 그래픽 및 콘텐츠 디자인 실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이고, 내가 911에 대해 얼마큼 미리 조사하고 연구했는지 보여주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 경력을 알리고, 과거 경험과 현재 업무와의 연관성을 어필하는 시간이다. 즉, 기본적인 신뢰도를 (credibility) 쌓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오, 이 놈 일 좀 하겠네?' 인상을 심기 위한 작전이랄까.


그다음은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될지 큰 그림을 소개한다. 이 그림에 동의하는지, 추가 사항이나 다른 아이디어가 있는지 꼭 물어봐야 한다. 그 후엔 내가 필요한 정보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프로젝트를 진행할지 설명하는 것으로 짧은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프로젝트의 큰 그림과 방향을 결정하는 질문 폭격 과정에 들어간다. 이때 주의할 점은 '아, 그런 뜻인 거겠지' 하고 지레짐작하지 말고, 명확하게 서로가 원하는 바와 방향, 기대치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본격적인 '현재 상태 분석' 과정에 들어가면 세부 사항이 변경되거나 추가, 삭제될 수는 있지만 이 프로젝트를 하는 목적, 원하는 결과치나 기대치, 방향성을 잘 잡아두고 문서화시킨 다음 정확하게 그 문서에 사인까지 받는 것으로 기초공사를 마무리해야 한다. 그렇게 북미식 교육 프로그램 개발의 첫 단추가 끼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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