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5. 한국이동통신 상장,
정부재투자기관 최초 사례

5부. 1세대 이동통신

by 김문기

88 서울올림픽은 단지 스포츠 축제가 아니었다. 그 무대 뒤에는 정보통신 주권을 향한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와 한국데이터통신(현 LG유플러스)은 각각 전화와 데이터 사업에 국한돼 있었으나, 이 시기부터는 상호 교차 진입이 허용되며 기능 분화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사명을 한국이동통신으로 바꾸며 본격적인 독자 사업에 돌입했고, 국내 첫 ‘이동통신 서비스’ 사업자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국내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통신 강국들은 한국의 기술과 시장 잠재력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아시아에서 새로운 경쟁자가 부상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글로벌 경쟁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카폰, 무선호출기(삐삐), 그리고 이제는 휴대전화까지. 이동통신 시장의 모든 주도권은 한국이동통신이 쥐고 있었다. 초기 서비스는 여전히 비쌌고, 단말기도 고가였으며, 유지보수나 요금제는 일반 소비자에게 부담이 됐다. 그러나 ‘고가-고품격-희소성’이라는 특수 조건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미엄 가치를 만들어내며, 수요는 폭증했다.


공중전기통신사업자로 독립적 지위를 부여받은 한국이동통신은 체신부의 지도 아래 자율경영체제를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한다. 1989년 5월 1일, 체신부는 ‘자율경영 기반 조성계획’과 ‘이동통신서비스 발전계획’을 한국이동통신에 시달했다. 핵심은 민간 자본 참여와 기업공개(IPO) 추진이었다.


이동통신 시장은 아직 대중화 초기였고, 무리하게 경쟁을 유도하기보다는 한 사업자의 내실을 다지는 전략이 선호됐다.1) 한국이동통신은 차량전화 약 2만3천 회선, 무선호출 약 8만1천 회선을 기반으로 약 10만 명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기업 공개를 단행하기엔 여러 제약이 존재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김문기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IT 전문지에서만 10년 넘게 근무하며 전세계를 누볐습니다. 이전에 정리했던 이동통신 연대기를 재수정 중입니다. 가끔 다른 내용도 전합니다.

146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8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20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매거진의 이전글14. 88서울올림픽, 1G 이통 깨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