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3세대 이동통신(IMT-2000)
정보통신부가 IMT-2000 사업자 선정을 위한 ‘기간통신 사업자 허가요령 및 심사기준’을 최종 확정하기는 했으나 시장의 갈등은 더욱 커져만 갔다.
네트워크 장비업체는 동기식을, 이동통신사업자는 비동기식을 밀어붙였다. 중재를 해야 할 정부는 입을 닫았다. 어디까지나 시장자율에 맡기겠다는 의도이기는 했으나 오히려 미래 불확실성만 키웠다.
갈등을 해소할 실마리가 잡히지 않자 정보통신부는 2000년 9월 14일 IMT-2000 사업자 선정을 미루겠다고 발표했다.1) 좀 더 업계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의도였다. 어차피 연말 내 사업자만 선정하면 된다는 목표였기 때문에 쉬어가기를 택한 셈이다. 다만, 쉬어간다는 것도 정부가 뒷짐을 진 형태였기 때문에 도무지 결판이 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됐다.
기술표준을 확립하기 위해 차세대 IMT-2000 기술표준협의회가 마련됐다. 9월 22일 대한상의에서 첫 회의를 개최한 협의회는 달을 넘긴 10월 4일 공개토론회를 갖기로 합의했다.2) 동기식과 비동기식에 정통한 석학을 참여시켜 기술과 경제성을 가늠하겠다는 의도였다.
1차 공개토론회는 그야말로 난상토론이었다.3) 우선 동기식을 주장한 곳은 삼성전자였다. 만약 비동기식을 채택한다면 국내 기술력이 열위이기에 외산장비를 들여올 수밖에 없고, 또 국내 기술이 그만큼 발전하더라도 사업자가 국내 장비를 구매할지 미지수라는 입장이다. 이미 보유한 CDMA 기술을 통해 확실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음에도 비동기식이라는 모험을 감내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같은 네트워크장비업체인 LG전자는 다른 논리를 폈다. 이미 비동기식 장비 개발에 착수해 외산업체에 뒤지지 않는 성능의 장비를 생산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외산업체들 역시 동기식은 사라질 기술로, 미래를 내다봤을 때 비동기식을 선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사업권에 도전하는 이동통신 사업자들은 비동기식으로 입장이 모아졌다. 다만, 단일표준과 복수표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했다. 아울러, 기술력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면 사업자 선정을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정부의 속내는 달랐다. 사업자를 설득해 어느 한 곳은 동기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간 꾸준히 CDMA를 밀어왔던 정부 입장에서 동기식이 낙동강 오리알이 된다면 약 10여 년간의 노력이 정책 실패로 끝날수 있다.
학계와 시민단체는 정부와 업계 모두를 비판했다. 정부는 소신 없는 행동을 멈춰야 하고, 기업은 자사 이기주의를 벗어나야 한다고 호통쳤다. 하지만 너무나도 다르고 많은 이견이 쏟아지는터라 쉬이 결론이 날리는 만무 했다.
정보통신부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내놨다. 하지만, 그간 주장했던 민간자율과 거리가 멀어 또 다른 분란을 조성했다.
10월 10일 정보통신정책심의회를 개최한 정보통신부는 자율적인 기술표준 선택을 철회하고 대신 비동기식 1곳과 동기식 1곳, 비동기와 동기식 중 구분 없는 1곳이라는 'IMT-2000 정책방안'을 확정했다.4)
정보통신부의 새로운 정책방안은 동기식 2곳과 비동기식 1곳이 될 수도 동기식 1곳과 비동기식 2곳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한국통신과 SK텔레콤, LG텔레콤이 모두 비동기식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것. 즉, 3곳 중 1곳은 원하지 않는 사업권을, 또는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더군다나 거의 와해 상황에 놓인 한국IMT-2000은 경쟁에서도 배제돼 있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를 동기식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정부 입장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각 컨소시엄은 180도 달라진 정책방향에 정부를 맹비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판단에 기대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같은 자신감은 정부 압박에 따라 동기식으로 밀려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절박했다. 한국통신은 1대 주주가 정부라는 점을, SK텔레콤과 LG텔레콤은 비동기식 개발을 진행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동기식에 대해 앞선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발목을 잡힐 수 있는 여지가 다분했다. 그렇기에 끝까지 비동기식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야만 했다.
시간은 흘러 결국 정보통신부는 10월 18일 IMT-2000용 주파수 공고를 냈다.5) 동기식 1곳, 비동기식 1곳, 동기 또는 비동기식 1곳 등 총 3개 사업자를 선정하겠다고 발표했다. 해당 주파수는 총 60MHz 대역폭으로 각각 20MHz씩 주어지게 된다. 주파수 이용기간은 15년. 출연금은 1조 3천억 원에서 1조 원 사이로 책정해야 했다.
사업허가 신청서 접수는 25일부터 시작돼 31일을 마감일로 정했다. 이때까지도 이동통신 사업자들은 완강하게 비동기식을 주장했다. 정부도 더 이상 이들을 말릴 수 있는 카드가 없었다.
마감일을 하루 앞둔 10월 30일 LG그룹(LG IMT-2000추진단/ LG글로콤) 먼저 접수에 나섰다.6) LG전자와 LG텔레콤, 데이콤 등 LG그룹 지분 60%를, 현대자동차 등 751개 주주들이 함께했다. 초기 자본금은 3천억 원, 증가를 통해 총자본금을 1조 2천억 원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한국통신(KT-IMT컨소시엄)이 뒤를 이었다.7) 한국통신과 한국통신프리텔, 한통엠닷컴 등 한국통신 패밀리들이 약 60%에 가까운 지배주주로 참여했다. 팬택과 온세통신, 성미전자 등 636개 사가 참여했다. 초기자본금은 5천억 원으로 증자를 통해 총 자본금 1조 4천500억 원을 마련하겠다는 로드맵을 세웠다.
마김일인 31일 SK텔레콤(SK-IMT컨소시엄)이 마지막 접수에 나섰다.8)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이 과반을 넘는 지배주주로, 포철과 파워콤 등 783개 기업이 참여했다. 초기자본금 3천억 원으로 법인을 신설해 증자를 통해 약 1조 5천억 원을 마련한다고 발표했다.
3개 사업자의 눈치싸움은 그야말로 뜨거웠다. 3개 컨소시엄은 모두가 비동기식을 선택했기 때문. 즉, 3개 컨소시엄 중 1개 컨소시엄은 반드시 탈락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업자 선정 공모가 순탄하게 흐르지 않았다. 느닷없는 변수가 등장했다. 와해될 것으로 예상됐던 한국IMT-2000 컨소시엄이 막판 접수에 나섰다.9) 앞서 컨소시엄에 핵심인 하나로통신 역시 사업권 포기 의사를 간접 시사한 만큼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시장뿐만 아니라 정부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큼 한국IMT-2000의 접수 준비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물밑에서 지속됐다. 게다가 비동기식이 아니라 동기식에 도전했다. 즉, 자격이 주어진다면 한국IMT-2000은 당당하게 IMT-2000 사업에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떨어지더라도 동기식 사업자를 다시 찾겠다는 정부와 플랜B를 세워놓은 타 컨소시엄에게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었다. 만일을 위한 예비 자리가 한순간에 사라진 순간이다.
한국IMT-2000을 이끈 대표적 기업은 하나로통신이다. 1997년 정보통신부가 한국통신과 경쟁할 제2시내전화사업자를 세우기 위해 허가를 내린 기업이다. 삼성전자와 한국전력공사, 데이콤 등이 참여해 같은 해 9월 23일 공식 출범했다. 시내전화사업뿐만 아니라 유선인터넷 서비스인 ADSL 사업도 시작했다.
당대를 기억하는 고객이라면 “나는 ADSL, 따라올 테 면 따라와 봐”라는 광고 카피를 떠올릴 수 있다. 이 광고의 주체가 바로 하나로통신이다. 하나로통신의 IMT-2000 도전은 시내전화와 유선인터넷에 이은 이동통신사업으로의 확장에 나선 결과다.
하나로통신의 습격에 정부와 업계는 표정관리가 어려웠다. 하나로통신 역시 긴급하게 움직인 결과였다.10) 신윤식 하나로통신 사장은 마감 3주 전 사업 참여를 결단, 약 30여 명의 직원들이 극비리에 사업계획서를 작성을 하달했다. 이 때문에 타 컨소시엄뿐만 아니라 정부 역시도 눈치채지 못한 것. 얼마나 극비였으면 대주주였던 LG나 삼성, SK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허허실실은 하나로통신에게 어울리는 사자성어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발을 굴렀다. 만약 비동기식에서 한 컨소시엄이 탈락하게 되면 탈락 대상자를 압박해 동기식으로 밀어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로통신의 급작스러운 접수에 의해 플랜B는 사장됐다. 기업들도 이번 기회에 IMT-2000 사업권을 따내지 못하면 차세대 이통사업은 영영 이별해야 하는 처지였다.
즉, 기업들에게는 미래를 걸고 반드시 따내야 하는 사업이 된 셈이다. 탈락은 곧 폐업을 의미했다.
하지만 사실상 하나로통신도 가시밭길 행군이다. 규정상 한 항목이라도 60점 이하의 점수를 받거나 총점이 70점 이하면 아무리 1개 컨소시엄만 동기식에 지원했다 하더라도 부격적 판단에 따라 탈락하게 된다. 무엇보다 대기업 눈치뿐만 아니라 두 눈을 부릅뜬 정부에게도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됐다. 게다가 하나로통신의 대주주가 LG와 SK였다. 우선적으로 컨소시엄 구성뿐만 아니라 자금조달과 재무구조, 망구축 로드맵에 대한 안정성을 담보하는 게 시급했다.
한편으로는 국민주 반발에 따라 하나로통신이 IMT-2000 사업권 도전에 등 떠밀렸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후 하나로통신이 탈락한 비동기식 컨소시엄과 결합한다는 발표, 대주주 자리를 넘겨줄 수도 있다는 발언 등이 이 같은 지적에 대한 신뢰를 더해주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한국IMT-2000 컨소시엄은 사전서류전형은 통과했다.11) 정보통신부는 11월 1일 허가신청현황을 발표하면서 총 4개 사업자를 후보로 낙점했다. 비동기식은 LG글로콤과 한국통신IMT, SK IMT 등 3곳, 동기식은 한국IMT-2000으로 결정됐다.
정보통신부는 11월 3일부터 11일까지 허가가능여부를 검토하고 20일부터 12월 14일까지 가격심사와 계량/비계량 평가를 실시하기로 했다. 최종 발표는 12월 말로 결정했다. 주요 심사항목으로는 기간통신역무 제공계획의 타당성과 전기통신 설비규모의 적정성, 재정적 능력과 주주구성의 적정성, 제공역무 관련 기술개발실적과 계획 및 기술적 능력 등을 평가하기로 했다. 각 심사사항은 60점 이상, 총점은 70점 이상을 받아야 적격판단을 받을 수 있으며 고득점 순으로 당락이 결정됐다.
비계량평가는 그야말로 심사위원들의 고난의 행군이었다. 천안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에서 합숙평가를 가진 심사위원 18명은 10일 동안 사업계획서만 들여다봐야 했다. 교육원 바깥출입은 금지됐다. 개인평가뿐만 아니라 토론에 따른 심사과정도 거쳤다.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한 평균점수가 도출됐다. 점수계산에는 공인회계사 2명이 나서기도 했다. 이렇게 도출된 비계량평가는 계량평가 결과와 합산해 12월 14일 정보통신부로 넘겨졌다.
실제 발표는 좀 더 연말에서 좀 더 앞당겨졌다. 모든 결과지를 받아 든 정보통신부의 입에 모든 기업들의 귀가 열렸다. 주가는 오르내림을 반복했다. 2000년 12월 15일 정보통신부는 IMT-2000 최종 선정 컨소시엄을 발표했다. 각 컨소시엄의 직원들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 김광현 정종태 기자, <'기술표준'논란..IMT2000 사업권 신청기한 한달 연장>, 한국경제, 2000. 9.15.
2) 임규준 기자, <내달 4일, IMT-2000 기술표준 공개토론회>, 매일경제, 2000. 9.22.
3) 김태한 기자, <[IMT2000]'동기-비동기' 원점서 맴맴...합의안 도출 불투명>, 동아일보, 2000.10. 4.
4) 김광현 기자, <IMT-2000 사업자 주파수 구분 선정...정보통신부>, 한국경제, 2000.10.10.
5) 윤봉섭 기자, <IMT-2000주파수할당>, 국민일보, 2000.10.18.
6) <LG, IMT-2000 사업계획서 제출>, 매일경제, 2000.10.30.
7) 윤봉섭 기자, <IMT 2000 LG 한통 '비동기' 사업서 제출>, 국민일보, 2000.10.30.
8) 류현성 기자, <SK텔레콤, 비동기방식 IMT-2000사업계획서 제출>, 연합뉴스, 2000.10.31.
9) 류현성 기자, <하나로통신 IMT-2000 동기방식으로 신청(종합)>, 연합뉴스. 2000.10.31.
10) 정재호 기자, <허찌른 하나로 "007...깜짝쇼..."IMT-2000 동기식 신청>, 국민일보, 2000.10.31.
11) 김광현 기자, <하나로통신 '동기'신청 유효...정보통신부>, 한국경제, 2000.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