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의 암투병 마지막 때였다.
항암치료를 하며 몸이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시고 살 날이 얼마 안 남으셨다며 연락을 받으면 신혼집과 2-3시간 거리의 병원을 일주일에 여러 번 오갔던 때이다.
아버님은 회사일에 바빠 신앙을 놓으셨다가 투병 기간 다시 교회에 다니셨다. 세상 무서울 것 없으신 분이셨는데 몸이 쇠약해지시니 죽음을 너무도 두려워하셨고 죽음 이후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불안해하셨다.
말씀도 거의 못하시던 때, 그날은 남편과 나에게 어머니를 잘 모시라는 신신당부를 하셨다. 또렷한 정신에 또렷한 발음이셨다. 그 말에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고 그러하겠노라 아버님을 안심시켜 드렸다.
주말이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머니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남편과 상의를 하였다. 나는 어머니를 죽어도 모실 수 없다고 완강히 주장해 왔다. 아버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 성격상 어쩔 수 없었다. 한 지붕 아래 친정 엄마와 할머니의 고부갈등을 보고 자라며 마음의 상처가 컸고, 이 일을 나중에 태어날 자식들이 겪도록 놔둘 수 없었다.
어느날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캠퍼스에서 신혼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어머니 모시는 문제를 놓고 걸어가며 기도하는 중에 이런 음성이 들렸다.
너는 아브라함처럼 네 자식을 나에게 내어놓을 수 있니?
내 명령이 중요하니, 내가 준 네 자녀가 중요하니?
머리를 울리고 가슴을 치는 음성에 나는 길에서 오열하고 말았다.
아, 하나님이 나에게 내 자녀를 달라고 요구하시는구나.
나는 무슨 수를 써도 시어머니를 우리 집에 모시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은 우리 자녀가 할머니 손에 크길 원하시는구나.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우리 부부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할지 알 수 없는데..
그 불안을 내려놓고 시어머니를 품으라 말씀하시는구나..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음성에 답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나는 자녀를 내려놓으라는 그 음성에
'그렇게 하겠다'라고 답했다.
자녀를 주신 분이 그분이실 테니, 그분이 원하시면 데려가시는 것도 가능했기에.
자녀를 우상 삼고 있음을, 내 상처와 아픔을 우상 삼고 있음을 깨닫고
모든 비관적인 상황과 나의 불안을 뛰어넘어
상황을 바꾸시고 일하실
그분을 신뢰하기로 했다.
그 주말, 나는 남편과 함께 시어머니를 잘 섬기기를 다짐하며 하나님께 시아버지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시아버지는 임종을 맞으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아버님을 데려가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님이 천국에 평안히 계실 거라 믿는다.
표지 사진: 사진: Unsplash의engin aky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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