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엄마와 풀어야 하는 애착의 문제
유년 시절 엄마와 감정적 교류가 없고 깊은 대화도 안 나누었는데
결혼 후 특히 출산 후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엄마가 내 아이들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사랑받는 듯한 마음이 든다.
엄마가 내가 낳은 아기를 안고 있으면
젊은 나의 엄마와 어린 내 모습과 겹쳐 보여
엄마가 어린 나를 이렇게 사랑해 줬으리라 상상하며
엄마의 사랑을 온 맘으로 느끼며 사랑의 결핍을 치유하고 있다.
어렸을 때 난 늘 엄마가 그리운 아이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엄마는 아침을 차리고 출근하셔서
밤 10시가 넘어 들어오는 날이 매일 반복됐다.
엄마와 동네 놀이터에서 논 기억도, 함께 목욕을 한 기억도 없다.
아주 어렸을 때 흰 눈이 펑펑 온 날 엄마와 놀이터를 간 모습이 담긴
사진만 존재할 뿐이다.
엄마는 어린이 전집 영업팀에서 일했다.
당시 아줌마들에게 아이들 독서 교육 연수를 해주며
책도 사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마케팅으로 엄마들을 꼬셨다.
엄마는 처음엔 자녀들 책을 사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을 무려 20년 동안 하셨다.
엄마의 빈자리는 성격이 예민하고 포악한 할머니가 채웠다.
엄마는 고등학교부터 시작한 나의 기숙사 생활에서 매주 라이드를 해주시며
워킹맘으로서 하실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나는 감정적 교류가 없는
(나도 말이 없긴 했지만 엄마도 나와 이야기 나누는 걸 어려워하셨다)
엄마의 보살핌과 사랑에 목말랐다.
20살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생각난다.
캠퍼스 선교단체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인생의 목표를 돌아보던 중,
내 인생의 목표는 성공, 이를 통한 부모님의 인정과 관심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나에게 부재했던 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그 즉시 회사에서 일하고 계시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나, 엄마의 사랑이 느껴본 적이 없다"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배 아파 낳아 키워주신 엄마의 모든 노력을 부정하는
어처구니없는 말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때는 내 결핍과 빈 구멍을 바라보고 느낀 점을
솔직하고 용기 있게 표현한 발언이었다.
내가 사랑받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결혼 후 19년 동안 시어머니를 모셨지만
그 시절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다 되어가도록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
내가 시어머니로 힘들어하는 최근에서야
'정말 힘들었다' 한마디 정도로 표현하시는 분이시다.
고부관계 스트레스를 회사생활을 하며 푸시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못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다 내가 아이를 낳은 후 '엄마'가 되고 나서야
친정 엄마와 전보다 훨씬 많은 교류를 하고 있고
'가족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연대하고 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난 지 50일도 되기 전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렸을 때
한걸음에 달려와 아이를 봐주셨다.
아이 셀프 100일 잔치 때 반찬 대여섯 가지와 고기요리를 하셔서
시댁 식구들에게 대접하셨다.
그 후에도 우리 가족이 아플 때마다 여전히 일하시는 엄마는
귀한 휴가날 우리 집에 오셨다.
둘째 아이 제왕절개 수술일 전 갑작스럽게 진통이 왔을 때
엄마의 휴가와 겹쳐 첫째 아이를 돌봐주실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시어머니와 갈등을 겪으니
그 어려움을 먼저 공감한 친정 엄마와 나누게 된다.
앞으로도 조금씩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마음속 이야기도 꺼내면서
유년시절 어색했던 엄마와의 관계가
점점 풀렸으면 한다.
나의 사랑의 언어는 섬김이다.
체력이 약하다 보니 누가 나를 대신해 무언가를 해주고 섬겨주면 참 고맙고 사랑을 느낀다.
아이를 예뻐해 주시는 친정 엄마의 사랑을 받으니 시어머니를 섬길 힘도 난다.
사실 우리 부부는 시어머니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많이 받았다.
받은 만큼 하면 되는데 지칠 때가 있다.
엄마의 사랑으로 충전받아, 사랑받는 자녀로 사랑을 흘려보내야겠다.
표지 이미지: 사진: Unsplash의Jakub Kapusn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