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아이의 생애 첫 감정의 기억 (3) 편안함과 수치심
나는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녔다.
아빠와 할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셔서 다니게 된 교회에 태어나서 9살까지 계속 다녔다.
부모님과 할머니는 대예배에 가시고
나는 오빠와 함께 유치부 예배를 드린 기억이 난다.
나중에 우리는 초등부에 가지 않고
부모님을 따라 대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오빠와 함께 드린 주일학교 예배는 유치부가 유일했다.
그 당시 유치부 예배에서는 찬양시간에
빼곡히 음표와 가사를 적어놓은 전지 악보를 보며
선생님의 율동을 따라 했다.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주의 은혜 나누며~"
"무화가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그 시절 자주 불렀던 찬양이다.
찬양은 즐겁고 명랑했다.
찬양이 끝나면 전도사님이 나와서
인형극 등으로 매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말씀을 전해주셨다.
아이들이 집중해야 했기에 내용은 핵심만 짧게.
그래도 재밌게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예배가 끝나면 소그룹으로 모여 교재를 가지고 공과공부를 한다.
공과공부 시간에 했던 스티커 붙이기, 색칠놀이 등이 재밌었다.
매주 예배에 출석하고 헌금을 내거나 하면 달란트를 주셨는데
달란트를 모아 일 년에 한두 번씩 열리는 달란트 시장에서 맛있는 간식과 학용품을 사는 재미가 쏠쏠했다.
달에 한 번씩은 아이들이 다같이 앞에 나가서 사도신경, 주기도문 같은 것을 외우고
시편 23편 같은 성경도 외워서 잘하면 상도 주었던 것 같다.
나는 성실하게 교회를 다녔고 외우는 것도 곧잘 했다.
예배가 끝나면 부모님과 교회 식당에 가서 밥과 미역국 또는 배추된장국과 김치로 이루어진 점심밥을 먹었다.
메뉴는 간단했지만 너무너무 맛있었다.
아직도 그곳에서 먹은 미역국과 된장국, 김치 맛이 생각난다.
점심을 먹으면 교회 근처 큰 공원의 놀이터에서 놀다 집에 갔다.
거기는 동전을 넣고 타면 일정 시간 동안 움직이는 자동차도 있었고, 아이들용 짚라인과 분수대도 있었다.
예전 앨범을 들여다보면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 여럿 있다.
부모님과 함께 공원에 나와 노는 시간이 나에겐 행복 그 자체였다.
외출을 자주 안 하는 우리 가족에게
주일은 매주 교회를 가는 날,
그것도 꽤 거리가 떨어진 교회를 가느라
나들이 같이 여겨지는 날이었다.
교회에 다녀오면 부모님은 꼭 낮잠을 주무셨고
나는 오빠와 둘이서 놀다가 인기가요를 보다가
배고프다며 엄마를 깨우는 게 주일 오후의 풍경이었다.
우리는 유치부만 다니고 초등부엔 가지 않았다.
부모님도 어느 순간부터 구역예배를 드리지 않고 대예배만 드리는 선데이크리스천이 되셨다.
나와 오빠도 초등학생부터는 대예배에 따라가서 온 식구가 매번 예배 때 졸다 집에 왔다.
교회는 우리 집에서 공기 같은 것.
정작 설교 말씀은 기억이 안 낫을지언정,
주일에 교회를 안 가면 옷을 안 입은 것처럼 허전한 것이 되었다.
그렇게 교회 가는 게 즐거웠고
예배가 재밌었고
소속감이 좋았다.
교회는 이후로도
외로웠던 나를
위로해 주는 공동체가 돼주었다.
엄마가 맞벌이를 하시게 된 후, 오빠는 학교 가기 전 유치원을 다녔지만 나는 7살 때를 빼곤 다니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옆집에 사는 동갑 친구 혜수네서 놀았다.
혜수는 언니와 남동생이 있는 삼 남매 중 둘째였고 나도 둘째니 처지가 비슷했던 것 같다.
그 집에서 나는 재미있는 놀이를 했다.
종이인형 놀이도 하고 공주 스티커도 붙이고 만화영화도 봤다.
바지와 속옷을 벗고 주사를 맞는 은밀한 간호사 놀이도 했다.
혜수네에는 그 당시에 소파도 있고 실내 골프 스윙 연습 인조잔디도 있어서 같은 아파트에 살았지만 우리집과 생활수준 차이가 나는 듯했다. (90년대 당시에 골프가 취미인 사람.. 혜수네 아빠 외에 보지 못했다.)
그 집도 우리집처럼 할머니가 계셨는데 왜인지 혜수가 우리집에 놀러 온 기억은 잘 안 난다.
아마 우리 할머니가 손님이 오는 걸 싫어해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우리 아빠는 짠돌이였다.
우리집은 방이 3개 있는 20평대의 좁은 집이었는데 할머니 방 하나, 엄마아빠와 오빠와 내가 자는 방 하나가 있었고, 남은 하나는 세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줬다.
돈과 관련된 부끄러움은 기본 장착된 감정이었나 보다.
달걀 후라이를 그 집에서 간식으로 처음 먹어봤다.
노른자를 깨 줄까 말까 물어봤을 때 나는 그게 무슨 차이인지 몰라 대답할 수 없었고,
케찹을 뿌려먹으면 맛있다고 했는데 나는 케찹맛을 몰라 안 뿌린다고 했다가 맛이 없어 후회했다.
분명 계란은 먹어봤을 텐데 계란찜이나 계란말이를 먹었지 계란 후라이는 우리집에서 익숙한 메뉴는 아니었던 듯하다.
놀라운 점은 그 집에 자주 놀러 갔고 (약간 좀 무서운) 언니, 귀여운 남동생, 할머니와 엄마 등 혜수네 가족들과 다 친하게 지낸 듯한데 그 집에서 한 마디도 안 하고 올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고 있던 사실인데 최근에 엄마와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다, 혜수네 엄마가 oo이는 집에서 놀 때 한마디도 안 하고 논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내가 혼잣말이 많고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친했던 친구 집에서 하루 종일 놀다 왔는데 그렀으려고 싶으면서도, 그 말을 듣자 현재 내 성격과 기질의 어느 한 부분이 깨우쳐지는 기분을 느꼈다.
기질은 태어날 때부터 형성된다는데 나는 원래부터 조용하고 나 자신을 표현하기 소심했던 것이다.
(날 닮은 둘째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되었다. 나는 순하거나 느린 기질의 아이라는 것을..)
우리 가족은 모두 밖에선 가면을 쓴 듯 말이 없고 감정표현을 잘 안 하고 남들에게 맞춰주다가
집에 오면 가족들에게 쏟아내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부모님과 정서적 소통이나 교류가 적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책잡히거나 밉보이지 말라는 유, 무언의 압박을 느끼며 컸다.
나 자신의 어떤 부분을 사람들에게 드러낼만하지 않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우리 아빠부터가 그랬다.
그래서 뭔가 낯선 게 있어도 당당하게 물어보지 못하고 내면에서 스스로 소화를 했다.
계란 후라이와 케첩을 몰랐을 때 아는 척했던 것처럼.
경제적 궁핍함, 그리고 그에 따른 경험의 부족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다.
남들이 모두 당연히 아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나도 아는 척을 하며 넘겨야 한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 자신이 떳떳하다면 그게 뭐냐고 물어보고 답변을 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 세계에서는 그게 쉽지 않다.
"야 너 그것도 모르냐?"
이 한마디를 들으면 얼굴이 새빨개진다.
순식간에 '뭘 모르는' 아이가 된다.
그게 뭐 어떻다고.
지금은 그럴 수 있다 생각하지만 그때는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그룹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있어 보이는 척을 그만두고
나 자신을 더 오픈해 보라고.
아직은 그래도 괜찮은 나이라고.
교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안정감을 느끼며 용납받는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공동체이다.
혜수네에서는 재미있었지만 관찰자 모드로,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존재했다.
사람들과 있을 때의 약간의 긴장감, 나를 편히 내보이지 못하는 마음.
내 마음의 안정감이 우리 가정에, 우리 부모님에게 있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뿌리가 얕은 식물 같은 느낌이다.
나에게 편한 것, 익숙한 것인 가족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야 하는 것이 되었고,
나는 더 주눅 들고 자신 없는 아이가 되었다.
이제는 그런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 품의 포근함과 함께하심을 깊이 느끼고 있다.
나의 친부모님보다 더 크고 능력 있으시고 나를 더 사랑해 주시는 분,
그분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자신감이 생겼다.
20대 때부턴 하늘 아버지의 백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 없고 숨고 싶었지만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나는 내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어도 가치 있는 사람이다.
(ps. 그 당시 어색했지만 이웃인 나를 사랑해 준 친구와 가족들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