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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Jul 24. 2019

출장 혹은 여행 : 엄마 오리의 마음

리스본 #2

  회사의 얼마 안 되는 직원 복지 혜택 중, 해외연수 프로그램이 있다. 최대 8박 9일의 일정으로 해외의 세미나나 박람회를 가거나 견학을 신청하는 프로그램인데, 사실상 자유여행이나 다름없다. 보통 8~9년 차 정도 되면 자신의 순번이 돌아오는데, 나는 일도 바빴고 회사 사람들이랑 여행을 가는 건 제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썩 내키지 않아 매번 다음 순번에게 양보를 해왔다.


  하지만 올 해는 선뜻 가겠다고 나섰다. 우선 함께 가는 세명의 멤버가 괜찮았다. 너무 자기 의견만 고집하거나, 여행 중에 불평불만을 늘어놓거나, 무엇보다 밤에 숙소에서 마실 팩소주를 한 뭉치 싸올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럽이었다. 8박 9일의 유럽. 가족을 챙겨도 되지 않는 8박 9일의 유럽여행이라니, 이제 나도 회사의 행사에 솔깃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목적지는 리스본과 스위스. S과장이 제안서를 작성해 통과한 일정이었다. 게다가 그는 네 명 중의 막내. 항공권, 호텔, 렌터카 등 모든 예약을 하고, 여행 일정을 계획했다. 사실 이것도 내가 이번 프로그램에 선뜻 참여한 이유 중 하나였다. 내가 막내가 아니라는 것.

  사실, 딸이 태어난 후로 내 여행의 모습은 그 이전과 매우 달라졌다. 더욱이 여행 일정을 대부분 내가 계획하기 때문에, 여행에서 일어나는 상황-버스를 탈지 택시를 탈지 결정하고, 몇 번 버스인지 확인하고, 우버 앱을 깔아 택시를 잡고, 렌터카를 빌려서 운전을 하고,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수건을 채워달라고 하는 등의 일-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딸은 종일 수영장에만 있고 싶어 하고, 아내는 매번 내게 스케줄을 묻는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에 간다고 했지?’

  이번 여행은 이런 책임감은 덜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 있겠다.   



  여행의 둘째 날은 리스본 근교의 태양광 발전시설 견학이 잡혀있었다. 이번 해외 연수의 주요 목적 중 하나다. 이 곳을 가기 위해 S과장은 한국에서 미리 렌터카를 예약해 뒀고, 오전 중에 서둘러 견학을 마치고 오후에는 그 렌터카로 다른 여행지를 둘러볼 계획을 세웠다.


  7시에 기상하기로 했지만, 시차 때문인지 그때까지 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 어제 사온 계란과 과일로 간단한 아침을 준비했다. 나는 주말마다 계란 프라이를 하던 솜씨로 써니사이드업을 만들었고, K부장은 포르투갈산 소시지를 굽고, P차장은 처음 보는 납작하게 생긴 복숭아를 씻고 테이블 세팅을 했다. 그런데, 커피가 없었다. 주방에는 보란 듯 커피메이커가 있었지만, 찬장을 아무리 뒤져도 커피가루는 보이지 않았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집을 나설 때는 8시쯤이었다. 렌터카 업체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였고 예약시간은 9시였지만, S과장은 서둘렀다. 한시라도 빨리 견학을 마치고, 관광지에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나머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숙소 밖으로 나와서, 응? 생각보다 볕이 강하네, 하며 선크림을 발랐고, 아, 선글라스를 놓고 왔네 하며 다시 숙소에 들어갔다. 나는 느긋하게 그들을 기다리며, 가는 길에 어디서 커피나 한잔 사 마셔야지 생각하고 있었고.

납작한 복숭아_ⓒK부장


  S과장이 구글맵을 켜고 앞장섰다. 나머지 셋은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오리들 같았다.

  리스본은 폼발 후작 광장Marquês de Pombal을 중심으로 남측은 옛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구시가지, 북측은 현대적 건물이 늘어선 신시가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숙소에서 북서쪽으로 10분쯤 걸으니 대로가 나왔다. 리스본에서 처음 보는 6차선의 큰 도로다. 서쪽으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폼발 후작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15분쯤 걸린다고?’

  ‘이 쪽이 신시가지 쪽이구나.’

  ‘차는 뭐 빌렸어?’

  민트색이나 핑크색의 예쁜 건물이며, 울퉁불퉁한 돌로 만든 오래된 길바닥이며, 한국과는 다르게 생긴 신호등 따위의 사진을 찍으며 마음껏 한가히 걸었다. 물론 구글맵을 들고 있는 어미 오리만 빼고.

  ‘아, 여기서 커피 한잔 사 가지고 가요.’

  내가 고대하던 작은 카페가 나왔다. ‘올라Olá’ 하고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3잔과, 라테 1잔. 뜨거운 커피를 손에 드니, 걸음은 더 여유로워졌다. 역시 유럽의 아침에는 커피를 마셔야지.

길모퉁이 카페(Pastelaria Restaurante Duque)_ⓒP차장


  렌터카 업체에는 8시 반쯤 도착했다. 어차피 예약은 S과장 이름으로 되어있고, 나는 운전을 할 것도 아니니 이번에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괜히 핸드폰도 한번 들여다보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잠깐 밖에 나가 지나가는 차도 바라보고, 렌터카 사무실의 다른 외국 손님들도 구경했다. 미리 예약을 하고 왔어도 여권과 국제 운전면허증을 확인하고 차종을 정하고 서류를 작성하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급할 건 없었다. 지루할 것도 없었다. 9시가 좀 넘었을 때 드디어 우리가 탈 파란 BMW를 마주했다. 외관 체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남은 연료량을 확인하던 직원이 말했다. 5분만 기다려줄래? 지금 기름이 거의 없어서 내가 채워가지고 올게.


  5분이면 온다던 직원은 30분 정도 후에 나타났다. 저녁에 차를 반납하러 돌아올 때 보니, 그 근처는 대부분 일방통행이라 가까운 거리를 가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30분 동안 나는 여전히 느긋했다. 몇 시에 출발하는지는 상관없었다. 오후에 갈 예정인 관광지에서 시간을 조금 덜 쓰는 것도 아무 문제없었다. 가려는 곳의 이름도 알지 못했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따라다니기만 하면 될 뿐이니까. 반면, 우리의 어미 오리 S과장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늘의 일정이 정확히 짜여있었고, 3마리의 아저씨 새끼오리에게 그가 계획한 코스를 다 보여줘야 했다. ‘왜 이렇게 안 오지?’ 그가 이 말을 세 번째쯤 했을 때, 내가 대꾸했다. 좀 늦어도 괜찮아, 상관없어.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우리, 오후에 가는 곳이 어디라고 했지?

어미 오리의 뒷모습_ⓒK부장


표지 사진 : 리스본의 사암 길바닥_K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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