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기운이 나지 않을 만큼 커피를 좋아한다. 특히 모닝 커피를 이토록 사랑하는데, 지금까지 내 기억속 강렬하게 진하게 남아있는 커피 맛이라면, 퇴사 후 한 달 동안 홀로 스페인 여행을 떠났을 때 매일 이른 아침 커피바에 앉아 마셨던 에스프레소와 카페 콘 레체, 오렌지 주스, 크로와상 하나. 그리고 파리 살 때 매일 아침 부엌에서 내려 마셨던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과 바게트 한 조각의 맛이다. 에스프레소에 꼭 설탕을 털어 넣어야 한다. 파리 살 땐 난 꼭 큐브 수크헤를 사서 똑 넣어 마셨다. 그때의 낭만, 그 시절의 낭만이 날 절로 미소짓게 한다.
나이 들어갈수록 참 좋았던, 즐거웠던, 행복했던, 황홀경의 순간들이 이토록 많은 걸 보면 난 참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난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추억할 것들이 가득한 걸 보면."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인간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파리 살 때, 주로 모노프히에서 장을 봤는데, 자주 해먹었던 요리중 하나는, 로스티드 치킨 구이였다. 모양도 제각각인 유럽감자를 슬라이스해 버터로 듬뿍 마리네이드한 치킨과 함께 바싹 구워내는 건데, 거기에다 모노프히나 프헝프히에서 산 5천원대 와인 하나면 그 시절 한끼로 충분했다. 제일 저렴한 와인이 2.95유로 정도 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만원 짜리도 충분히 맛있었다. 치즈도 장볼 때 빼놓지 않고 사는 것이었다. 이렇게 저렴한 와인은 사서 요리할 때 넣고 나머지는 한 두 잔 정도 마시고 그렇게 파리의 부엌은 그 시절 방황과 우울을 반복했던 나.를 위로하고 달래고 안아주는 참 다정하고 친절하고 살가운 것이었다.
이 아침 문득 커피를 마시다 그 시절을 떠올리는 이 사유의 무작위함이란, 그러나 그 끝은 늘 이렇게 날 흐뭇하게 미소짓게 만든다.
파리 살던 때 친구 파비앙이 저녁 초대를 해서 갔는데, 그의 어시스턴트와 함께 만든 오리 구이와 샐러드를 맛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난다. 그러곤 스위스에서 사왔다는 푸아그라 반쪽을 똑 잘라 집에 갈때 싸줬다. 파비앙의 아틀리에는 18구 몽마흐뜨 근처였는데 파리시에서 인정한 현대 미술가, 예술가들만이 살 수 있는 집이자 아틀리에라고 한다. 문 앞에 도착해 전화를 하니 파비앙과 어시스턴트가 나왔다. 대문은 웅장했고 그 안을 들어가면 연결되어 있으나 한 집 한 집 각기 다른 예술가들의 집이자 아틀리에가 나왔다. 오후엔 쨍한 여름햇살을 맞으며 그의 아틀리에 마당에서 쏘시쏭과 바게트, 마당에서 갓 딴 미니 방울 토마토와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저녁을 먹고 늦은 밤, 우버를 타고 3구 집까지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나는 파리의 밤, 파리의 야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그렇게 사색에 푹 잠겼던 기억이 난다.
파리 가기 전, 광화문 직장인 시절 출근길이었다. 늘 그렇듯 익숙하게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다 일민미술관 벽면에 불멸.이라고 써있는 커다란 전시 간판을 보고선, 어떤 전시일까.했던 기억이 선명한데, 그 불멸 전시의 작가가 바로 파비앙이었다는 사실. 파리에 왔을 땐, 오페라역에서 맛있는 한식을 사주기도 했던 참 고마운 친구다. 아틀리에에서 저녁을 먹고 디저트를 먹는 도중, 즉흥적으로 그려준 에펠탑 위에 앉아 있는 나.의 모습. 즐거웠던 파리 살던 그 시절 추억 중의 하나다.
파비앙과의 대화 중 인상깊었던 건, "절대로 부.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뭇 진지했는데 파비앙이 살고 있는 집은 파리시에 한 달 10만 원 정도 렌트비만 낸다고 했다. 그 왈, "한 달에 10만원만 내면 되는데, 다른 곳에 살 이유가 없어. 난 정말 만족해. 파리 시에서 10만 원만 내면 살 수 있는 곳이 어디있냐구?ㅎㅎ" 실은 파리에서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현대 미술가임에도 그는 소박했고 자기 만의 것.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파리 현지 친구들과 대화해보면, 특히나 이런 부분에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그 시절 참 많이 방황하고 내 스스로를 괴롭혔던 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방황은 내게 선물이었다는 걸 이토록 실감한다. 인생은 꼭 좋은 일만도 꼭 나쁜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흐름이라는 것, 좋은 일이 있으면 안좋은 일이 있고 안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온다는 것, 인생이 항상 내가 원하는대로 되라는 법이 없다는 것, 내게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기대하지 않는 것이 사는데 훨씬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도 이젠 경험적으로 잘 알게 된 나이가 됐다.
늘 생각하는 건, 고혹적인 사람, 매혹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람이 있는데, 그것은 눈빛이 빛나는, 눈빛이 아름다운, 내면의 순수와 지혜를 담고 있는 눈, 눈빛을 유지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눈빛이 깊은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는데, 나이들어간다는 건 깊어짐도 있다. 지금에서 스무살의 나를, 20s, 30s초반의 나를 떠올리면, "그땐 참 뭘 몰랐구나. 어쩜 그렇게 뭘 몰랐을까? 세상 물정 몰랐을까?"싶은 아쉬움과 후회, 안타까움은 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참 좋겠다, 혹은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싶지만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전적으로 유리하다.
누구에게나 서툴렀던 자기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 서툼과 뭣 모름.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되고, 깨닫고,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닌가? 그 어떤 것도 그냥.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있다. 지금의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본다. "지금 나의 기운은 어떤지. 지금 나의 기분과 감정은 어떤지. 내 안의 어떤 불편함이 있진 않은지."하는 것들. 그러다보면 선명하게 문제가 보일 때가 있다. 확실한 건, 지금의 나는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해주세요."가 아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게 그걸 받아들일 용기와 지혜를 주세요."라고 말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괜찮아.의 마음, 무엇을 가져야지만이 행복하다는 게 아닌 무엇을 가지지 않아도 무엇이 되지 않아도 무엇이 없어도 나는 행복하다는 마음. 그 무조건적인 행복과 평온과 평안에 관심이 있다.
그러다보니 이전과는 다르게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줄었다.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움과 우울감이 밀려오곤 하지만, 이는 내게 일어난 사건이란 걸 알아차리니 그러려니, 또 왔구나. 잘 머물다 가렴.하는 의연함이 생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엔 수용의 지혜와 태도를 갖추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엔 기꺼이 나 자신이 주인이 되는 일, 이 나이쯤 되니 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삶의 지혜와 태도들이 점철되어 간다.
나이들어간다는 건, 눈빛이 깊어지는 일인 것 같다. 눈빛이 깊어진다는 건 내면이 깊어진다는 것과 같다.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마흔 가까이 되어서야 알게 되는 것이었나. 것이었구나. 꼭 이 나이쯤이어야 했을까? 꼭 이 나이쯤 되어야지만이 알게 되는 걸까?"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거나 지혜로운 사람일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독서를 통해 그 안의 지혜를 자기 자신만의 것으로 통찰한 사람은 그 사유의 시선이 확장돼 유연한 사고를 할 거란 생각은 있다.
이십대는 정말 뭣 모르던 시절인 것 같고 젊음.에 취해, 청춘.에 취해 본인이 원하는 걸 하고자 하는 것만 생각하고 몰입하게 되는 당당함과 자신감과 호기로움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삼십대, 삼십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여전히 뭣 모르는, 넘어지고 일어지기를 반복하는, 여전히 인생이란 게 무엇일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질문하지만 잘 모르겠는, 그런 나이인 것 같다.
이십대, 삼십대 초반만 하더라도 아직은 잘 모르겠는, 시절이란 생각. 그러다 어느 순간 서른 후반, 마흔 가까이 되면 희한하리만치 확 와닿는 것들이 많아지고 직관적으로 알게되고 깨닫게 되고 통찰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진짜 깊어지는 나이란 이십대도 삼십대 초반도 아닌 서른 후반, 마흔 언저리가 아닐까싶다. 경험적으로도 그렇고 그쯤 되면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되는, 회광반조하게 되는 그로인해 동시에 자기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시기가 아닐까.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의 노화가 이젠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게 되는 시기일 수도 있고, 나의 나이들어감과 노화와 함께 내 사랑하는 부모님의 나이들어감과 노화가 더욱 명징하게 인식하게 되는 시기라서 이기도 할 것이다. 그제서야, 무릎을 탁 칠만큼, "맞다, 우린 죽어가고 있지. 우리 모두는 결국 죽게 되어있지.'하는 것들... 죽음을 인식하는 삶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 끝을 알고 사는 삶이란, 지금 이 순간을 더욱 귀히 여기게 되고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를 사랑하게 되고 존중하게 되고 친절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선물같은 삶이다.
깊어진다.라는 말이 참 좋다. 깊어진다.라는 말 속에서 나는 무한함이 보인다. 깊어짐엔 한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