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되는가?

by Aarushi

가장 좋아하는 시간, 순간 중 하나는, 아침 일찍 거실소파에 기대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일이다. 믹스 커피를 마실 땐 아이스로 마시는데 진한 믹스 커피를 마시면서 몇 장이라도 책장을 넘기거나 노트북을 켜곤 글쓰기를 하거나 캘린더에 이것저것 적고 표시를 해나가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거나... 무얼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딱 그런 상태, 그런 순간들이 날 편안하게 한다. 이토록 사소하고 시시하고 그래서 더욱 살갑고 다정한 나의 일상의 순간들이다.


여느 날처럼, 일하러 가기 전, 근처 파라솔이 있는 산책길 벤치에 앉았다. 우거진 수풀 속 빗방울과 바람결에 잎과 나무들이 춤추고 새들의 지저귐, 빗소리를 벗삼아 글 한편을 써내려간다. 이 벤치에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란 내게 일상의 황홀경이 된다. 모든 것이 아름다워보이고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는 마법이다. 이런 풍경에서라면 언제라도 나는 제3자가 돼 내 시야 속 펼쳐진 풍경들과 그리고 그 속에서 잠자코 있는 나.를 생생하게 알아차린다.


할머니댁에 가려고 표를 끊어놨는데, 차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시골이다. 시골로 내려가신지 꽤 되셨는데 지금은 집 텃밭에서 소일거리로 상추며 마늘이며 이것저것 가꾸느라 분주하시다. 빗방울이 거세지는 걸 보니 이번 주말에도 어김없이 장맛비가 내리려나보다. 비가 오더라도 다녀와야지.한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생각들을 지켜보다 그렇게 이 시간을 만끽한다. 내겐 이런 것들 모두가, 내게 일어나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련의 사건부터 그 무엇이든 정말이지 낭만이 된다. B급 감성 역시 이토록 사랑하는데, B급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B급 감성을 가진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낀다. 시시해도 정말이지 싱거워도 그 시시함과 싱거움 속에 웃음이 있고 사는 맛.이 있고 낭만이 있다.


문득, "대화가 되느냐?"라는 문장이 떠올랐는데, 나이 들어가니 더욱이 "대화가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다. 대화가 된다는 건 실은 내겐 웃음코드가, 유머코드가 비슷하다는 것도 있다. 대화의 결이 맞다는 건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닌, 상대방과의 자연스런 기의 작용, 기의 움직임, 기의 흐름이 비슷하다, 맞다.는 생각이 있다. 대화가 되는, 대화가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데, 인연이라면야 어떻게서라도 만나게 된다는 걸, 만나지려면 당장 오늘 밤에라도 떡 나타난다는 걸, 예기치 못한 순간에 등장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나는 사랑.에 대한 엄청난 의미부여 혹은 로맨틱한 감성으로 바라보기 보단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바라볼 수 있는 서로의 성장을 위해.라는 것보단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이대로도 당신은 충분해요.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랑과 존중 가득한 다정하고 친절하고 살갑고 함께 하면 즐겁고 재밌고 편안한 관계다.


비 내리는 오후, "대화가 되느냐?"라는 일으켜진 한 생각이 기어코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돌이켜보면 20대 땐 로맨틱한 러브가 사랑이라 믿었다. 그게 맞는 줄 알았고 어찌보면 그렇게 학습돼 온 걸 당연시했다. 꽤 오랜시간 나 자신과 대화하고 이런저런 갖은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와 삶의 통찰은 연인과의 사랑.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했고 알게 했다. 내게 사랑은, 내어주는 것인데, 그것은 "당신뿐이에요. 당신이라면 모든 걸 내어주겠어요. 당신 없으면 안돼요."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라도 좋겠어요."다. 그러다 보니 기대하지 않는다. 결국 나 자신이 우뚝 서있어야 한다. 나 자신이 바로 서지 않고 상대를 사랑하면 집착이 된다. 서로 사랑해도 집착이 없어야 한다. 혼자여도 즐거울 때, 혼자여도 외롭지 않을 때 연애하면 상대방이 무얼하든 신경쓰이지 않는다. 나는 나, 상대는 상대. 서로를 존중하는 것,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사랑을 하게 된다. 그 존중이 상대로 하여금 날 더욱 매력적이게 한다.


내게 사랑은, 상대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안하길 바라는 것이다. 연애할 때, 상대방이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껏 해서 차려주는 걸 좋아하는데 그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닌, 순전히 내가 내어주고 싶은, 내가 그렇게 해주고 싶은 나의 사랑표현 중 하나다. 상대방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 상대가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지난 시절 생각해보면, 뭣 모르던, 세상살이에 취약하고 나약했던 20대 때 결혼을 했더라면, 서른 초반에 했더라면 어땠을까.싶을 때가 있다. 그때 결혼하지 않은 것이 내겐 결국 이로운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나를 알고 정신적으로 깊어지고 성숙되었을 때라야 한 남자의 아내, 아이 엄마가 되었을 때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다, 지혜롭고 현명한 아내, 엄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지금의 나는, 사랑하는 사이엔 한 인간으로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중, 연민의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론 나의 평온함과 단단함과 의연함과 편안함이 상대에게 안정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나 역시도 상대와 같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의 내게 또 다시 사랑이 찾아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확실한 건, 지금의 내게 사랑이란, 이십대, 서른 초중반의 그것보단 훨씬 더 확장된 사랑.일 것이다. 그저 상대가 행복하고 건강하고 평안하고 편안하기만을 바라는 것.에 있다.


대화가 되는가?라는 질문은 상대 뿐만 아니라 내 스스로에게도 던져야 할 질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인가?"

"나는 상대에게 좋은 기분을 주는 사람인가?"

"대화가 되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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