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로 오늘 아침 할머니댁에 가려던 일정을 취소하고 일어나자마자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제 오후에 마늘을 미리 뽑아 창고 켠에 잘 두었는데 아침에 보니 밤새 비가 들어와 젖었다고 하신다. 하는 수없이 전부 까서 냉장고에 넣어두어야겠다고. 할머니는 간다고 하면 늘, 먼길까지 힘들게 올 거 없다. 차비들고 시간들고 내 새끼 오지 말고 돈 모으라고 하신다. 우리집 세자매, 할머니 손녀들은 자기들이 갈 수 있을 때 각자 알아서 다녀오곤 하는데, 그래서 지금은 언제 갈거라고 말씀드리면 힘들게 오지 말라고 하시니 할머니한테 미리 전화드리지 않고 출발하고서야 가고 있다고 전화를 드린다. 막상 가면 그 누구보다 반가워하고 좋아하실 할머니다. 이제는 할아버지 없이 혼자 계실 할머니가 걱정돼 마음이 쓰여 전화도 매일 드리고 가족들 모두 자기들의 방식대로 잘 살피고 있는 중이다.
할머니는 지난 화요일에 언니와 동생이 왔다 간 이야기를 신이나 하신다. 아침에 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따신 밥을 먹이려고 밥이랑 서둘러 했는데, 언니가 한사코 할머니 맛있는 점심 사드린다고 뭐 드시고 싶냐고 해서 추어탕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고 한다. 손녀들 덕분에 읍내로 나가서 아주 맛있게 드셨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시는 걸 보니 그 행복감이 내게도 전화너머 그대로 전염되는 듯했다. 그전에 언니와 통화해서 알고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우리 할머니 너무 바쁘셔^^ ㅎㅎㅎ"했다. 2시까지 노인정 춤 수업을 들으러 가셔야 한다고 해서 점심을 먹고 차로 언니와 동생이 할머니를 노인정 앞까지 모셔다 드리고 왔다고 했다. 할머니는 내게 전화너머 그날 손녀들 먹으라고 떡 사준다는 걸 깜빡했다고 어찌나 속상해하시던지.
할머니와 대화는 계속 이어졌는데 지금의 나는 할머니에게 좋은 리스너가 되어준다. 그날 오후 노인정에서 무엇을 적어내라고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행복합니다."라고 적으셨는데 강사분이 이유를 물으니 할머니는, "우리 손녀들이 와서 점심으로 추어탕도 사주고 할머니 사랑한다고 하고 안아주고 나를 보러 와줘서 정말 행복합니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듣는 내내 내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지난 번 자라에 갔다가 할머니 뵈러 갈 때 드리려고 옷감이 좋은 쨍한 노란색 반팔 티셔츠를 샀는데 지금 내가 할머니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렇게 할머니께 지금 가장 필요하신게 뭘까?하는 것들... 전화 너머 할머니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리스너가 되어주는 일, 할머니를 꼭 안아주는 일, 아주 자주 사랑한다고.말하는 일이다. 할머니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시는데, 우리 대화의 끝은 늘 "내 새끼 사랑한다.". "할머니 사랑해요."를 핑퐁처럼 2-3번은 주고받고 나서야 끊는다.
나이 들어가며 더욱 느끼는 건, 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친절함과 다정함이란 생각을 한다. 친절한 마음과 다정한 마음은 기운이기도 하고 그것은 정말이지 전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상대에게 그대로 닿는 일.이다. 내 따뜻한 마음이, 내 다정한 마음이, 내 친절한 마음이, 내 사랑이 상대에게 지금 고스란히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 닿는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그 행위의 가장 큰 수혜자는 나 자신이 된다. 내가 행복해진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이면 벌써 할머니댁에 도착해 따뜻한 할머니 밥을 먹고 있을 텐데, 집 거실에 앉아 홀로 조용히 나만의 고요로 침잠해 글 한편을 쓰고 있다. 오늘 꼭 찾아뵙지 않았어도 전화 너머 할머니와 나는 이미 만난 것이다. 나는 고요함으로써 내 안이 꽉 차 있음을, 텅비어 있음으로써 가득찬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이 있다. 내가 가진 것이 내가 아님을 알고 진짜 나는 고요하다는 걸, 그 자리에 빛나고 있다는 걸, 나 자신이 내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행복.이란 걸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내게 소중한 건,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친절하고 다정하고 살가운, 따뜻한 인간이 되는 일이다.
LED조명 하나 켜둔채 빗소리를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글 한편 써내려가는 이 순간,
이것이야말로 무릉도원이 아니고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