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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캔디부부 Oct 30. 2022

구직활동의 시작.
나도 이제 음악중재전문가!

우여곡절 끝에 대학원을 졸업했다. 1040시간 이상의 임상실습과 인턴십 과정을 거치고, 수많은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고. 교수님 앞에서 덜덜 떨며 발표를 하고, 논문을 썼다. 논문 발표를 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겨울날, 가족들과 함께 예쁜 학위복을 입고 졸업사진도 찍었다. 음악중재전문가가 되기 위해 각종 서류를 준비해 제출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결과는 합격. 나도 이제 음악중재전문가(KCMT: KOREAN CERTIFIED MUSIC THERAPIST)가 되었다. 음악치료사가 된 후,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음악치료사로 일을 하기 위해 내가 어떤 대상군과 일을 할지 정해야 했다. 

이전에 말한 것처럼 나는 여전히 완화의료 세팅, 병원 세팅에 관심이 있었으나 너무나 슬프게도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19는 구직활동에 큰 영향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3차 병원 완화의료센터에서 인턴십 과정을 할 때 시작된 코로나19 영향으로 내담자를 만나러 가지 못하는 상황이 여럿 생겼었다. 이 영향이 이렇게 크게 있을 줄이야.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마냥, 내가 원하는 대상군만 고집할 수가 없었다. 음악치료사를 구하는 기관은 대부분 장애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기관들이었기에, 일단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치료사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인턴십 기간에 교내 음악치료 연구실에서 근무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올라온 기관들을 중심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력서를 메일로 보낸 후, 매일같이 메일함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분명 이력서를 보냈는데, 돌아오지 않는 답장은 내 마음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한 기관에서 메일이 왔다. “00 선생님. 보내주신 메일 잘 받았습니다. 면접을 진행하고 싶은데, 가능하신 시간 회신 부탁드립니다.” 음악치료사가 된 후 보게 된 첫 서류합격 메일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잘 추스르고, 면접을 다녀왔다. 면접 준비를 하며 내 소개는 어떻게 할지, 나는 어떤 음악치료사가 되고 싶은지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막상 면접 자리에 가서 센터장님과 마주 앉으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 말을 쏟아내는 나 자신을 보았다. 결과는 역시나 불합격. 아무 이력도 없이,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수정하며 말 그대로 취업준비생의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눈앞이 캄캄했지만, 마음 저 구석에서 ‘넌 할 수 있어!’를 외치며 취준생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또 다른 면접 기회가 찾아왔다. 집에서 조금은 먼 거리에 있는 장애아동기관이었다. 여러 개의 지사를 가진 비교적 큰 기관이었고, 면접장에 도착하니 많은 치료사 선생님들이 면접을 보러 왔다. 꽤나 좋았던 면접 분위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락을 기다리던 중, 합격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규직으로 근무할 수 있는 기회였고, 4대 보험과 함께 연차 사용이 자유로운 꿈의 직장 같은 곳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하던 날. 집에서 여유롭게 나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근을 했을 때 내가 마주한 것은 ‘당혹함’ 그 자체였다. 면접을 보러 갔던 기관과는 사뭇 다른 허허벌판, 장애아동들을 바라보는 동료 선생님들의 차갑기만 한 시선. 무엇보다 이들의 음악치료에 대한 무지함은, 내가 음악치료사로 채용이 되었음에도 기관에서 음악을 사용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날의 당혹감. 근무를 하고 있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그 힘든 대학원 과정을 버티며 음악치료를 공부한 것은 적어도 이런 기관에서 일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근무하는 내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차올랐고, 결정적으로 한 동료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선생님, 계약서 오늘 쓰시기로 했죠? 오늘이 기회예요. 도망가세요.”라고 귀띔해 주는 것을 보며 나의 꿈같았던 첫 출근날, 퇴사를 결심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퇴사를 허락받았다. 그렇게 나의 첫 출근은 쓰디쓴 패배로 끝이 났다. 

그 힘들다는 대학원 과정 석사를 졸업하고 보내는 이력서마다 거절당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존감이 내려갔다. ‘나는 결국 이런 기관에서 밖에 일하지 못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아주 무겁게 내 마음을 압도했다. 이후 동기들의 소개를 통해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넘치는 좋은 기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큰 충격으로 남았던 나의 구직활동의 슬픈 기억들은 지금 경험하는 따뜻함들로 하나, 둘 지워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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