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 보면 자기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들이 많이 생기곤 한다. 그것이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공감하는 것이든. 그러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의사를 표현하고,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조금의 용기가 필요하다. 생각보다 내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돕고 싶었다. 놀이터에 가서 "나도 그네 타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급식소에 갈 때 "나랑 밥 같이 먹을래?"라고 물어볼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만난 혜림이는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5세 여자아이였다. 조심성이 많고, 말이 많이 없다고 하길래 어떤 아이일까 궁금했는데 처음 만난 혜림이는 어쩌면 내가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작은 체구로 의자에 앉아 낯선 치료실 환경을 두리번거리던 혜림이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안녕하세요. 근데 선생님은 누구예요?" 라며 말을 걸었다. 내가 음악 선생님이라고 소개하자 "그럼 여기선 뭐해요?"라고 묻던 혜림이. 자기표현이 어렵다고 의뢰된 것치고는 꽤나 적극적으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려 하는 모습이 어딘가 귀여워 보였다. 처음 혜림이와 활동을 시작하며 색깔 악보를 만들었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의 계이름을 빨, 주, 노, 초, 파, 남, 보로 매칭 하여 색깔을 보며 악기를 연주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때 색깔은 색칠을 하기도 하고, 클레이로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다. 혜림이와는 빨, 주, 노, 초, 파, 남, 보 7가지 색깔의 클레이를 활용하여 색깔 악보를 만들기로 했다. 여러 가지 색깔의 클레이를 혜림이의 앞에 떼어 놓고, 혜림이가 직접 다양한 순서로 색깔 악보를 만들도록 도왔다. 보통 색깔 악보 만들기 활동을 할 때 아이들의 성향이 조금은 드러나는데, 어떤 아이는 굉장히 조그맣게 클레이를 붙이는 반면, 어떤 아이들은 떼어준 클레이를 몽땅 붙여버리는 아이들도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아이들의 성향이 표현방법인 것 같다. 혜림이는 자기표현이 어려운 아이다 보니, 클레이를 주어도 아주 작게, 아주 조금 떼어 색깔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혜림이는 여러 가지 색깔의 클레이를 아주 조그맣게 여러 개 만들어서, 스케치북에 순서대로 붙였다. 빨간색부터 보라색 까지 차례대로 붙이고, 또다시 빨간색부터 보라색까지 차례대로 붙이기를 반복했다. 완성된 색깔 악보를 보며 혜림이와 함께 연주했다. 나는 피아노로, 혜림이는 공명 실로폰과 터치 벨로. 자신이 직접 만든 악보라서 그런지 매우 큰소리로 악기를 연주하려는 혜림이의 표정에서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드러나는 듯했다. 혜림이와의 첫 시간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어떤 순서로 색깔 악보를 만들 것인지 나와 함께 토의할 수 있었고, 함께 연주하며 더 큰소리로 악기를 연주하려고 하는 혜림이의 모습에서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으니까.
혜림이는 시간이 지나도 일상생활에서 자기표현을 어려워했다. 매우 수줍은 소녀가 되어 센터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도 치료실 문만 열고 들어오면 수다쟁이가 되었다. 아마도 혜림이가 그만큼 나와 있는 시간을 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일 거라 믿으며 혜림이와의 즐거운 활동을 이어갔다. 매회기 혜림이와 함께 활동에 대해 토의했다. 어떤 활동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혜림이와 함께 토의하다 보면 나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활동들이 등장하곤 했다. 노래를 부르며 발레를 해야 하는 날도 있었고, 혜림이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내가 노래를 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그만큼 혜림이가 활동을 직접 주도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흘러 혜림이의 종결 날. 조금 더 길게 함께 했어도, 도와줄 부분이 참 많겠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종결하는 날, 혜림이가 내게 "선생님, 진짜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친구들한테 자랑했어요. 저 이것도 할 줄 알고, 이것도 할 줄 안다고."라고 말했다. 어쩌면 혜림이에게 필요했던 건 다양한 경험을 통해 혜림이가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