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영훈이는 또래보다 발달이 느린 친구였다. 체구도 작고, 언어발달도 늦어서 영훈이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여섯 살이다 보니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자기주장도 강해 질 텐데 영훈이는 자기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니 점차 말수가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영훈이와 어떤 목표를 가지고 활동들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영훈이는 지금 발달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모든 치료에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어치료, 인지치료, 놀이, 음악, 미술 등등 발달을 위한 모든 개입을 하고 있었다. 그중 음악치료는 인지치료와 함께 묶여있었다. 인지치료 후 음악치료를 하는 방식으로 스케줄이 짜였다. 인지치료시간에 온갖 인지적 과제들을 수행하고, 음악치료실에 들어오면 영훈이는 늘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축 쳐져있거나, 에너지가 하나도 없거나. 그래도 다행인 건 음악을 참 좋아해서 활동을 시작하다 보면 에너지 수준이 점점 높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영훈이의 모습을 보면서 음악을 통해 영훈이가 부적 정서를 해소하고, 긍정적 경험들을 함과 동시에 노래 부르기와 악기 연주 같은 활동들을 통해 인지 과제들을 함께 수행하다 보면 영훈이의 발달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영훈이와의 음악치료 수업. 인지치료에서 에너지를 다 쏟고 늘 지친 모습으로 음악치료실에 들어오는 영훈이었지만, 그래도 활동에는 적극적인 편이라 다행이었다. 영훈이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지만, 그 말을 100% 이해하기가 어려워 최대한 한 가지 주제를 정해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하도록 유도했다. 제일 처음 정한 주제는 '음식'이었다. 알록달록한 에그 셰이커와 마라카스, 과일모형, 과일 셰이커 등 음식을 주제로 할 수 있는 악기들을 선택하고 음식을 주제로 활동을 시작했다. "어떤 음식을 만들까?"가 반복되도록 활동곡을 만들고, 노래를 반복하며 영훈이가 내 질문에 "00를 만들어요."라고 답할 수 있도록 노래 부르기 활동을 시작했다. 다양한 악기들은 조미료처럼, 노래 부르며 함께 요리하는 흉내를 낼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피아노로 활동곡을 연주하며 "영훈아, 어떤 음식을 만들까?"라고 내가 노래하면 영훈이는 너무 즐겁다는 듯 노래로 대답했다. "매운 치킨을 만들어요.", "빨간 김치를 만들어요." 등 영훈이의 톡톡 튀는 대답들이 노래를 더 신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훈이의 약간은 어눌한 발음으로 노래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고, 처음 매운 치킨도 알아듣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흘러 영훈이는 참 많이 성장해 개구쟁이 7세가 되었다. 또래에 비해 언어가 느린 편이긴 했지만, 말의 양이 정말 많이 늘었고, 발음도 비교적 정확해져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더 많아졌다. 영훈이도 주변에서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대화를 주도하는 듯했다. 영훈 이만의 세상에서 혼자 대화 나누다가, 누군가와 함께 대화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경험하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모든 치료사가 영훈이를 위해 노력했고, 어떤 목표로, 어떻게 접근해야 더 효율적 일지 치료사들도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처음 글자를 익히고, 명료한 발음을 위해 매진하던 영훈이의 치료 수업들도 점차 그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친구와 잘 대화하기 위해 어떤 표현들을 사용하는지 연습하고, 또래들과 함께 놀 때 어떤 규칙을 지켜야 하는지 연습하는 등 영훈이를 위한 활동들은 계속되었다.
음악치료를 통해서는 영훈이가 즐겁게 노래하도록 도왔다. 어느 날, 영훈이가 내게 "선생님, 이 노래 알아요? 저 이 노래 부르고 싶어요."라고. 정말 감격스러웠던 순간이다.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배운 노래인듯했다. 아직 글자를 다 알지 못해 가사지를 보며 노래할 수 없었기에, 친구들처럼 유창하게 노래 부르는 것이 어려웠던 영훈이는, 나와 함께 노래를 연습하고 싶어 했다. "저도 이 노래 잘 부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영훈이의 목소리와 아련한듯한 눈빛에서 영훈이의 성장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큰 스케치북에 영훈이와 함께 노래 가사를 써 내려갔다. 아직 글자를 다 모르지만, 이제 막 글자에 관심을 갖고 배우고 있었기에 함께 노래 가사지를 만드는 것도 영훈이에게 좋은 기회일 것 같았다. 큰 글씨로 함께 가사지를 쓰다 보니 영훈이에게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나 보다. "이 노래에 이건 왜 나와요?"라고 물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 영훈이.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기만 하다가, 직접 노래 가사를 써 내려가다 보니, 노래 가사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영훈이의 귀여운 질문이었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 가사에 집중하고 있다니. 욕심내지 않고 한 문장씩 노래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비록 한 문장씩이었지만 신나게 노래하고, 춤도 추며 노래하다 보니 영훈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 하나, 둘씩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구들 앞에서도 당당히 노래부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듯했다.
누군가에겐 평범할 수 있는 노래 부르기지만, 영훈이에겐 작은 꿈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큰소리로 노래 부르는 작은 꿈을 꾸던 영훈이는 하나, 둘씩 늘어가는 영훈 이만의 노래 목록을 보며 행복해했다. 더 크게 노래하고, 더 신나게 노래하고, 더 밝게 웃으며 자라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