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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Oct 27. 2024

나홀로 여행에서 깨달은 못된 버릇

ep 22. 판단하지 않는 연습


예전에 홀로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에게 양해를 구하면서까지 굳이 혼자서 낯선 곳을 향했다. 인생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괴로워서 떠난 것이었다. 어디 멀리 다녀온다고 해서 답을 찾는 것도, 엉키고 설킨 실타래가 풀리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에 쌓인 응어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익숙한 곳으로부터 잠시라도 멀어지면 겨우 숨통이라도 트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2박 3일 동안 갈아입을 속옷만 챙긴 다음 목적지는 정하지도 않고 냅다 차를 끌고 나섰다.


고속도로 입구를 향하던 중에 문득 도서관이 생각나서 홧김에 방향을 틀었다. 책 두 권 정도 있으면 나홀로 여행의 외로움을 달래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게 들린 도서관에서 <반응하지 않는 연습>이라는 제목의 책을 포함해 두 권을 대출했다. 내용도 모른 채 제목만 보고서 무심코 집어든 책들이었다. 이후 다시 고속도로를 향했다. 가고 싶은 데는 딱히 없었지만 일단 남쪽으로 달렸다. 좋은 마음으로 떠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행은 여행인지 그 와중에 약간의 설렘이 이는 걸 느꼈다.


2시간쯤 달렸을까. 경남의 어느 지역에 도착했다. 읍내를 통과하니 커다란 돌로 쌓은 성벽 같은 게 보였다. 근처에 명판과 안내문이 있는 걸 보니 사람들이 꽤 찾는 곳 같았다. 아랑곳 않고 멈추고 싶은 곳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운전했다. 성벽을 지나 조금 더 가니까 초등학교가 보이더니 이내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경북 영천에 있는 큰 집이 생각나는 곳이었다. 세울까 말까 고민하면서 약간 더 앞으로 갔다가 연꽃으로 가득한 연못을 발견했다. 그 옆엔 훤한 정좌도 있었다. 그 즉시 차를 세웠다.


연못의 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연꽃들이 아주 꽉꽉 들어차 있었다. 정좌는 동네 주민들이 자주 쉬다 가는지 누워 자도 될 정도로 깨끗했다. 날씨는 화창했고 공기는 신선했다. 숨을 내쉴수록 답답한 마음에 싱그러운 기운이 조금씩 들어차는 것 같았다. 정좌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연못과 맞닿아 있는 정좌 가장자리로 가 앉았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지그시 들여다봤다. 건너편의 마을, 마을과 나 사이를 수놓고 있는 연못 위의 연꽃들, 그것들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하늘. 모든 게 완벽했다.




그렇게 한동안 평안을 즐기다가 갖고 온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구사나기 류슌의 <반응하지 않는 연습>. 난 왜 '반응하지 않는 연습'이라는 제목에 눈길이 갔을까. 알 수 없었다. 한두 페이지를 넘기고 목차도 대충 훑어보고 난 다음 본 글이 있는 장을 딱 펼쳤는데, 첫 문단을 읽자마자 정신머리가 환해지는 듯했다. 당시 나를 들뜨게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는 모든 판단은 착각입니다.'


그런 문장은 그때 그 책에서 처음 봤다. 근데 분명 처음 보는 말인데도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동안의 독서는 '인간의 판단은 착각이다'라는 말의 저의를 깨닫기 위한 빌드업이었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 같으면서도 은근히 그럴듯했다. 그만큼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문장을 곱씹어 볼수록 희미했던 깨달음의 모양이 급속도로 선명해져 갔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일삼았던 일생 동안의 판단은, 책에서 일러준 대로 전부 착각이 맞는 것 같았다.


모임 하는 동안 내내 말이 없는 사람을 보면 내성적일 거라고 판단했다. 착각이었다. 말 끝마다 욕을 달고 사는 사람을 보면 인성이 쓰레기일 거라고 판단했다. 착각이었다. 생글생글 잘 웃는 사람을 보면 착한 사람일 거라고 판단했다. 착각이었다. 하루종일 집 밖을 나가지도 않고 게임만 하는 사람을 보면 루저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잔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을 보면 뭘 해도 서투르고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착각이었다. 생각할수록 생각으로 생각한 모든 생각들은 착각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생각 자체가 일종의 착각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난 그저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일뿐이었다. 내 이름도 내가 아니었다. 내 머리와 심장도 내가 아니었다. 내 팔과 다리 또한 내가 될 수 없었으며 심지어 그것들의 정확한 경계를 구분 지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마저 착각이었다. 난 엄연히 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나를 정의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런 생각 자체를 시도할 생각마저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근데 그런 내가 감히 남들을 판단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조차도 나를 모르겠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전체의 일부분만 보고서 함부로 판단하려 했을까.




책을 마저 읽어보니 왜 그렇게 판단하질 못해서 안달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판단은 그저 나를 드높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남들을 자꾸 판단하려 드는 심리의 기저에는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를 입증하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판단은 중독적이었다. 남들을 아무 생각 없이 판단했던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면 알게 모르게 좋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더불어 일말의 우월감도 느낀 것 같았다. 그래서 판단은 위험한 것이었다. 실제 난 남들보다 더 못난 것도 더 괜찮은 것도 아닌데, 남들을 멋대로 판단하여 나보다 낮게 봄으로써 스스로 더 괜찮은 사람일 거라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니까. 물론 인간의 생존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판단능력은 필수적이긴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판단은 독이었다.


그동안의 독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건 바로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반응하지 않는 연습>을 읽고 판단에 대한 반성과 사유를 하고 나서 되도록이면 판단을 일삼지 않으려고 했다. 재독의 중요성은 간과하고 속독만 파고드는 사람, 경제적 자유를 외치며 주식거래를 도박하듯 하는 사람, 식사량은 줄이지 않고 땀 한 방울 나지 않는 운동량으로 성공적인 다이어트를 꿈꾸고 있는 사람 등을 봐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 했다. 하지만 역시나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명상하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아도 틈만 나면 오만가지의 생각이 뇌리를 비집고 들어오듯이, 판단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써도 정신 차리면 이미 뭔가를 판단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판단함으로써 나를 추켜세우려는 걸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그 책을 펼쳐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아차릴 수 없었을 테니까. 판단하는 버릇을 고치는 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아도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다 보면 점차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언젠가는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나의 계획은 별다른 차질 없이 무탈하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팀장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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