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3. 팀장님이라는 뜻밖의 스승
팀장님의 첫인상은 '순한 맛이다', '착하다', '친절하다'라는 말들을 연상케 했다. 면접 보러 오라며 전화가 왔을 때 목소리부터가 그랬다. 면접날 실제로 뵌 팀장님은 면접관이라기보다는 회사 소개와 입사하면 하게 될 업무 내용 그리고 연봉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지급되는지를 안내해 주는 가이드 같았다. 입사 지원하는 입장에서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손수 빠짐없이 알려주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다 설명할 테니 넌 잠자코 듣고만 있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지만서도.
이후 팀장님을 좀 더 알고 나니까 보이는 것만큼 착한 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하직원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사무실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모르는 사람이 함께 타면 인사를 꼬박 건네시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나보단 친절한 듯했다. 하지만 팀장님의 친절함은 뼛속부터 우러나오는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어딜 가나 특유의 저자세를 취하고 보는 습관에서 파생된 것만 같았다. 팀장님은 통화를 끝내고 나면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뒷말이 많았다. 대부분은 상대방이 들어서 좋을 게 없는 말들이었다. '나였다면 굳이 부하 직원 듣는데서 그런 말은 하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절로 나는 그런.
사람은 누구나 가식적인 면이 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웃어 보여도 웃는 게 아닐 수 있으며 화가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할 수 있었다. 근데 내가 그러는 건 어물쩡 넘어가면서도 남이 그러는 건 유독 눈에 밟혔다. 참 나도 어지간한 속물이었다. 팀장님의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취하는 저자세와 날이 갈수록 하나둘씩 드러나는 가식적인 면모는 나로 하여금 팀장님을 낮게 보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에 난 팀장님을 지극히 개인적인 우월감을 충족시킬 수단으로 활용함을 마다하지 않았다. 겉과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데도 멀쩡히 다른 척하는 팀장님을 알게 모르게 무시하고 또 판단하기 시작했다.
<반응하지 않는 연습>이라는 책을 읽고서 판단하는 게 얼마나 자극적이고 중독적이며 장기적으로 큰 손해인지 알게 된 후로는 판단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판단 자체를 멈추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대신 남을 판단하려 할 때마다 알아차리는 건 어느 정도 연습을 기울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들쭉날쭉하지만 꾸준하게 우하향하는 그래프 모양처럼 판단하는 빈도수는 점점 낮아졌다. 판단하려는 마음은 판단하는 와중에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가라앉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 인식하는 것마저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힘든 만큼이나 보람은 있었다. 판단을 삼가면 삼갈수록 마음에 평온이 깃들고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판단중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내게 팀장님의 등장은 술로 가득 채운 방에 알코올 중독자를 들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남들을 판단함으로써 스스로를 추켜세우길 좋아하는 내게 팀장님의 존재는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상대방과 대화할 때 당최 끝까지 들어주는 법이 없고 말을 툭툭 끊어먹는 팀장님. 컴퓨터 앞에 앉으면 간단한 복사 하나 제대로 하질 못해서 끙끙 앓는 팀장님.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대안을 강구하긴커녕 어떡하지 어떡하지 걱정만 하는 팀장님. 본인이 실수한 건지는 알아보지도 않고 매번 엉뚱한 사람을 나무라는 팀장님. 상대방이 이해 못 할 수도 있다는 핑계로 온갖 사족을 곳곳에 다 갖다 붙이는 팀장님. 결국 본인이 붙인 사족들을 되려 헷갈릴 수도 있겠다며 다시 지우라고 시키는 팀장님. 이 모든 걸 매일 반복하는 팀장님. 그런 팀장님을 매일 마주하는 나. 어찌 그런 사람 앞에서 판단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럼에도 난 판단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만의 잣대로 상대방을 멋대로 판단하는 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좋을 게 없었다. 남을 판단하면 할수록 '난 맞고 넌 틀렸다'라는 관념만 강해질 뿐이었다. 그 그릇된 관념이 강해진다는 건 곧 지혜와 연을 끊고 어리석음과 살림을 차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에 따라 생각이 짧을 수도 있었다. 사람에 따라 비효율적으로 일할 수도 있었다. 사람에 따라 우유부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잘못된 건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잘나 봤자 미미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 또한 생각이 짧고 멍청하게 일하고 매사 우유부단한 면이 결코 없다고 말할 순 없었다.
팀장님과 함께 일하는 날이 누적될수록 어느새 팀장님 목소리만 들어도 부정적인 마음이 올라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차라리 사무실에서만 그랬다면 그나마 나았을 터. 판단중독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질 나쁜 기운은 퇴근 후에도 내 주변을 맴돌았다. 아내와 대화를 하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팀장님 생각이 났다. 그러고는 또다시 팀장님을 뇌리 속 심판대에 올림으로써 알량하고 비겁한 우월감을 남몰래 만끽했다.
한때 회사에서 속상한 일을 겪으면 아내와 사연을 공유함으로써 해소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아내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으면 내면의 뭉친 응어리가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난 그게 곧 해소의 과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해소가 아니라 해롭기만 한 순환의 가속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나 혼자 안고 있었으면 시간의 힘으로 금세 치유될 것을 괜히 아내에게 전달함으로써 각자가 찝찝하게 안 좋은 기분을 쓸데없이 나눠 가지는 것이었다. 그건 곧 아내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었다. 다행히 내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유유히 흘려보낼 생각은 않고 냅다 아내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걸 자각하면서부터는 겨우 자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신 차려 보니 또 난 팀장님 얘기를 아내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아내는 사무직 짬(?)이 나보다 월등히 높았기에 상황을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주워 들어서 더 말할 맛이 낫다. 그러나 곱씹어 볼수록 후회되는 짓이었다. 아내와 고운 말을 주고받아도 모자랄 판에 들어서 좋을 것도 없는 회사 얘기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성향도 나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끼친 적도 딱히 없는 데다가 독서와 글쓰기까지 겸비하다 보니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사람으로 거듭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가 가장 정제된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크나큰 착각이라는 것을 지금의 회사로 이직하여 팀장님을 만난 덕분에 깨닫게 되었다. 안 그래도 나를 스쳐가는 모든 이들이 곧 스승이라는 생각을 안고 있긴 했는데 팀장님의 존재는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가르침을 퍼다 주는 뜻밖의 귀한 스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