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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나라 Apr 16. 2022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수언니를 볼 때 마다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노사연의 만남처럼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  그랬다. 우리 만남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바램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인연의 불꽃이 타올랐다.
  체격도 크고 나이도 여덟살이나 더 많은 수언니를 보자 마자 어릴적부터 언니라는 호칭에 배가 고팠던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언니라는 말이 나왔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집밖으로 한번도 나가보지 못했다는 수 언니, 그녀는 발달장애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언니는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진행중인 다양한 프로그램을 접하는 신세계를 만끽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는 형제들이 돌아가며 반찬과 옷가지를 챙겨다 주어서 혼자서도 밥은 먹고 살았다. 그러나 의식주가 해결되었다고 혼자사는 외로움과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궁금증을 덜어주기에는 택도 없었다.
  2년전 나는 장애인복지관에서 기획한 발달장애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사회성을 키워주는 ‘시민옹호인 교육’을 받고 수언니와 짝궁이 되었다. 언니랑 친해지기 위해서 그 당시에 이틀에 한번씩 전화를 걸었다. 언니는 나를 다정하게 부르며 복지관에서 있었던 일들이며 아파트에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언니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최대한 나의 온 감각을 동원하여 공감해주고 늘 마스크를 잘 쓰고 다니라고 당부하며 전화를 끊었다.
  사실 장애라는 단어는 멀고도 가까운 사촌처럼 내게는 그냥 그랬다. 내 주변에 장애가족이 없기 때문에 남의 일인양 바라보다가 수언니랑 가까워지면서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는 일상의 불편함과 모르고 잃어버린 권리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졌다.
  한달에 두세번은 언니를 만나곤 했다. 까페에 가서 음료 주문을 한번도 못해 본 언니에게 스무가지가 넘는 음료의 맛을 설명해 드리고 주문을 도와드렸다. 복지관 부근에 있는 까페에 앉아서 처음으로 녹차라떼를 주문해서 마실 때 언니의 입가에 맴도는 환한 웃음이 기억난다.
  한번은 언니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드리려고 11시20분에 복지관에서 모시고 나왔다. 복잡한 점심시간을 피하기 위해 일찍 식당에 도착했지만 워낙 맛집으로 소문난 집이라 빈 테이블이 없었다. 문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었더니 팥죽이야길 꺼냈다. 그 즉시 메뉴를 바꾸어 팥죽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서 언니가 당신의 부모님 이야길 꺼냈다. 언니의 말을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어머니와 살때의 추억이 음식 속에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언니가 가지지 못했던 일상의 기쁨을 하나씩 찾아갈 수 있도록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일년이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런 우리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유난히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언니가 수술받으러 대학병원에 간다고 신나게 말했다. 마치 수학여행 갈 날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 수술한다고 하면 걱정이 먼저 앞서는데 환하게 웃는 언니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워 동생분과 통화를 했다.
   동생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뇨와 혈압때문에 내과 진료를 받던 중에 부인과 검사를 받아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산부인과 진료를 통해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었다고 했다. 보통 여성들은 질에서 나오는 분비물의 색깔이나 냄새로 이상유무를 체크하는데 언니에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발달장애는 제 나이에 맞게 발달하지 못한 상태를 모두 지칭하는 것이다. 언어, 인지, 운동, 사회성 등의 성장속도가 또래보다 느리다보니 가장 큰 건강의 적신호를 본인이 알아채지 못했다는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다행히 수술을 받고 집에 온 언니는 매주 방사선치료를 받으러 병원을 오갔다. 그 더운 삼복더위에 치료를 받느라 땀을 비오듯 흘렸다. 아이스 녹차라떼를 연거퍼 두 잔씩 들이키고 나서야 살 것 같은 표정으로  ‘ 보고 싶었어. 너는 절대 아프지 마’, 이 말을 녹음테이프를 틀어놓듯이 반복했다.
  보아하니 병원을 오가며 겪은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언니다운 간절함이 절절하게 전해져 가슴이 뭉클했다. 치료를 잘 받고 건강을 되찾는데 열중하도록
나는 자주 응원의 전화를 걸었다. 그것밖에는 달리 해드릴게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와서 식겁한 일이 있다.

밤새 안녕이라는 말처럼 며칠 사이에 무슨 변고라도 생겼나 가슴이 쿵쾅거렸다. 언니가 그 사이 하늘나라라도 갔으면 어쩌나 싶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알고보니  KT인터넷이 불통되던 날 언니 전화번호도 삭제되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지금은 웃으며 지난 이야길 할 수 있으나 그 당시 내 가슴은 숯검정처럼 탔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우리 사이가 더 각별해졌다.
  언니는 아이처럼 모든 걸 내게 이야기하길 좋아하고 나는 언니의 작은 눈을 열심히 바라보며 대답을 한다. 동생분은 언니가 나를 만나면서 표정이 밝아졌다며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하시는데 나는 결코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나 역시 수언니를 통해 그동안 몰랐던 것들을 새롭게 받아들이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벚꽃잎이 샤라랄라 떨어지는 서천변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 보니 배꼽시계가 울렸다.  언니가 길을 잘 아는지, 횡단보도를 잘 이용하는지 함께 보며 그러한 생활속의 나눔을 통해 장애인의 권리를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계기가 커져가길 소망한다.
  그렇게 혼자서도 산책하는 걸 불안해 하지 않고, 혼자서도 편의점에 가서 물을 사 먹을 수 있는 변화가 더디지만 하나씩 늘어나서 기쁘다. 이제 언니 혼자서도 미술관에서 그림감상도 할 수 있겠네 라고 말하니 ‘니가 있어야제’ 라고 웃는다. 다음 만남은 자연스럽게 미술관에서 만나기로 일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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