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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이 나면 다람쥐는 어떻게 되나요?

by 하늘나루

3월 말에 발생했던 대규모 산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불조심을 강조하기 위해 쓴 이야기입니다.


내 이름은 람(嵐)입니다. 마늘 밭 뒷산에 있는 땅 속 굴에서 막내로 태어났지요. 산들바람이 부는 날에 태어나서 그런 이름이 붙었답니다. 나에게는 형과 누나가 있는데, 가끔 나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싫을 정도는 아니에요. 밤중에 갑자기 깨우는 때도 있지만 몰래 도토리 조각을 건네주기도 하니까요. 바람이 불면 추운 데다가 먹을 게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먹이를 구하러 가는 날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리다고 못 갔지만, 이제 저도 충분히 자랐으니까요. 그간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 몰라요. 답답한 굴 속에서 바깥세상 소리를 듣고 있자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짹짹거리는 소리, 쿵쿵 울리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붕붕거리는 벌 소리까지도요. 그 소리가 모두 뒤섞여서 어린 제 귓가를 간지럽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가게 해 달라고 했지만, 늘 너무 어리다는 꾸지람을 듣고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람! 일어나. 먹이 구하러 가자!"


마침내 때가 왔습니다. 누나는 엄마와 같이 나가서 없고 대신 형 천(川)을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형은 저보다 몇 살이나 많아서 어디에 먹거리가 많은 지 다 알고 있거든요. 작년에는 아이들이 장난치다 남긴 도토리 더미를 발견해서 몇 달을 배불리 먹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형이 정말로 부러웠습니다.

"람아, 너 어디에 도토리가 많은지 알아?"


"오늘이 처음 나오는 날인데 내가 어떻게 알아!"


"잘 들어. 밤만 되면 산 근처의 캠핑장에서 인간들이 불을 피워. 인간들은 대부분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와. 그 애들이 심심하니까 이것저것 모으는데, 도토리를 줍기만 하고 먹지는 않아."


"그 귀한 도토리를?"


"당연하지. 인간들은 땅에서 주운 건 절대 안 먹으니까. 그럼 우린 살금살금 다가가서, 몰래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이웃에 사는 두식 삼촌이 인간들에게 잡혀 돌아오지 못한 일이 있었거든요. 제가 어린 아기였을 때 두식 삼촌이 사냥꾼들이 놓은 덧에 걸려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잡히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몰래 해야지. 원래 밥을 먹으려면 힘을 써야 해."


형은 멀리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가리켰습니다. 자세히 보니 아이들 몇 명이 뛰어놀고 있었죠.


"지금은 도토리가 나는 계절은 아니야. 우린 뒷산으로 가야 해."


나는 형을 따라서 산속으로 한참 들어갔어요. 도중에 작은 개울을 넘기도 하고 귀뚜라미도 만났습니다. 물소리가 졸졸 흐르고 푸른 잎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모습이 처음 나온 제 눈에는 정말로 예뻐 보였습니다. 하지만 늘 조심해야 했습니다. 언제 무서운 뱀이 쫓아올지도 모르니까요. 우린 그저 하늘다람쥐일 뿐이라 적이 언제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산속에서는 정말로 강한 다람쥐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짝을 만나고 아이를 낳는 건 더욱 힘들지요. 자칫 짝을 찾으려 돌아다니다가 잡아먹히는 다람쥐가 대부분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엄마가 정말 대단해 보였습니다. 엄마는 어떻게 무사히 자라서 아빠를 만난 걸까요? 풀에 걸린 엄마를 아빠가 발견해서 구해주었다는 얘기도 있고, 도토리를 먹다가 만났다는 이야기고 들었어요. 그런데 매번 이야기가 달라서 뭐가 진짜인지는 우리는 몰랐습니다.


아빠는 지금 여기에 없어요. 아이들이 케이지에 넣어서 데려갔거든요.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는 낫지만 영원히 아빠를 볼 수 없게 되어서 너무 슬퍼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이 커다란 숲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어요.


"어? 형. 어디로 갔어?"


몸에 한기가 돌았습니다.


"천(川)!"


큰일 났습니다. 딴 생각을 하다가 형을 놓쳤어요. 앞을 둘러보아도, 뒤를 보아도 형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늘 처음 나와서 길도 전혀 모르는데. 눈앞이 새카매져서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소스슥-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뱀인 걸까요?


'뱀이 오면 절대 돌아보지 말고 나무로 올라가야 해.'


언젠가 굴에서 들었던 엄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죽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냉기가 발 끝부터 올라와 제 몸을 완전히 휘감은 것입니다.


"왁! 놀랐지."


아. 형이 너무 미웠습니다.


"장난이었어."


"난 진짜 뱀인 줄 알았어! 그렇게 놀라게 하면 어떡해!"


형은 아주 재미있는 걸 보았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미안. 아무튼 이제 다 왔어. 밤나무 숲이야."

형이 앞을 가리켰습니다. 세상에나. 이렇게 먹을거리가 많은 장소는 처음이었습니다. 잘 익어서 벌어진 밤송이들이 앞이 안 보이도록 떨어져 있었습니다. 형에 대한 분노가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눈치도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무거나 잡아서 입에 넣으면 되었거든요.


"청설모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건너편 굴에 사는 청설모 아주머니도 와 있었습니다. 형은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이게 누구야? 람(嵐) 아니니? 정말 많이 컸구나. 완전 아기였는데 이렇게 먹이를 찾아 나올 줄도 알고 말이야."


"이제 안 어려요. 저도 먹이 구할 줄 안다고요."


제가 그렇게 말하자 아주머니는 미소를 짓고는 다른 나무로 떠나셨습니다.


"너도 좀 예의 바르게 굴어라. 아무튼 잘 봐. 밤은 이렇게 까는 거야."


형이 능숙한 솜씨로 밤을 벌렸습니다. 가시가 그렇게 많았는데 하나도 찔리지 않았습니다. 껍질이 벗겨진 노란 밤톨 하나가 형의 손에 들렸습니다.


"람, 너도 한 번 해봐."


난 조심히 밤톨을 열었습니다. 가시가 너무 많아서 따끔거렸지요. 몇 번 할퀴고 난 다음에야 밤을 꺼낼 수 있었습니다. 형이 상처를 핥아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프지? 처음에는 누구나 그런 거야. 계속하다 보면 너도 이렇게 깔 수 있어."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밤 조각 하나를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와, 밤은 어찌 이리도 맛있는 걸까요. 그 달큼하면서도 고소한 밤 한 알이 입 속에서 기분 좋게 부스러졌습니다.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까지 싹싹 핥아먹었지요. 형이 넣어 준 밤을 다 먹고 또 하나를 까서 먹었습니다.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할라. 난 저기 나무 위로 올라가 볼 테니까 넌 여기 널린 거나 좀 더 먹어."


형이 말했습니다. 저는 얼른 더 먹을 밤이 없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절벽 끝에 커다란 밤송이 하나가 매달려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약간 벌어져 있는 것이 정말 먹음직스러워 보였습니다. 그 고소한 향이 나의 조그만 코를 때렸죠.


'조심... 조금만 더...'


저는 살금살금 절벽으로 다가갔습니다. 돌이랑 낙엽이 많아서 발을 디디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배를 채울 수 있다면 그런 건 상관없었죠.


'조금만...'


앗. 발이 미끄러졌습니다. 다행히 가시에는 찔리지 않았지만, 절벽 아래로 한참을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흙먼지와 돌이 앞을 가렸습니다. 무언가에 부딪혔는데, 다른 다람쥐였습니다.


"앗! 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헛디뎌서.."


나는 급히 사과했습니다. 다른 다람쥐는 들고 있던 밤톨을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우리 가족만 아는 곳인데."


"제 형이 데리고 와 줬어요."


"그 형, 혹시 이름이 천(川)이에요?"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알고 보니 그 다람쥐는 형 친구의 동생이었습니다. 털은 나보다 짙은 갈색이었고, 훨씬 심하게 곱슬거렸습니다. 이름은 현(晛)이라고 했습니다. 햇살이 밝을 때 태어났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죠.


현의 가족은 우리 굴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또 저보다 한 해 앞서 태어났기에 형처럼 어디에 먹이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답니다. 형도 몰랐던 먹이의 위치까지 다 배운 나는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올 가을에는 먹이 걱정은 없겠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해야 해. 다시 올라갈 수 있겠어?"


현은 눈을 반짝이며 웃었습니다. 조금 괘씸했지만 하는 수 없었죠.


"네."


나는 현의 머리를 발판 삼아 다시 절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벽을 오르고 오르고 보니 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어코 올라왔네. 뭐 건진 거라도 있어?"


나는 자랑스럽게 그 커다란 밤 한 톨을 들어 보였습니다. 형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말했습니다.


"이제 늦었으니까 돌아가자.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정말이었습니다. 해가 어느덧 산 끝자락에 걸려 있었거든요. 나와 형은 올 때처럼 조심히 걸어서 굴로 돌아왔습니다. 엄마와 누나 환(煥)은 내가 가져온 밤을 보자마자 칭찬해 주었습니다. 누나는 아예 침까지 흘리며 감탄했습니다.


"처음인데 제법이구나. 이런 커다람 밤은 그 뛰어나다는 두식 삼촌도 못 구했단다."


"형이 찾는 걸 도와줬어요."


"잘했구나. 그래도 어린 밤톨까지 다 가져오면 안 된단다."


"왜요? 그럼 더 많이 먹을 수 있잖아요."


"그건 네 자식들을 위한 거야. 그 밤이 자라서 나무가 되고, 그래야 시간이 흘러도 다시 밤이 열리게 되잖니? 나중에 태어날 다람쥐들 몫도 남겨 놓아야 하는 거란다."


말을 마친 엄마는 내가 가져온 밤을 가져다가 끓는 물에 넣었습니다. 인간도 아닌 다람쥐가 어떻게 물을 끓이냐고요? 다 두식 삼촌 덕분입니다. 두식 삼촌이 마른 낙엽으로 불을 피우는 법을 배운 이후로는 마늘밭 뒷산의 다람쥐들이 모두 밤을 삶아 먹게 된 것이죠. 그냥 밤도 맛있지만 삶은 밤은 정말 부드럽고 맛있었습니다. 오래간만에 배불리 먹은 나와 형은 해가 아직 지지도 않았는데 푹 잠들었습니다.


나와 형은 종종 현 누나의 집에 놀러 갔습니다. 우리 셋은 술래잡기 놀이를 하거나 함께 밤을 찾으러 돌아다녔습니다. 현 누나는 우리 형만큼이나 상냥했습니다.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하나하나 빼 주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약초로 감싸 주기까지 했으니까요. 게다가 날개를 펴고 하늘에서 내려올 때면 그 어떤 하늘다람쥐보다도 멋있었습니다.


"형, 현(晛) 누나 내려오는 것 봤어? 진짜 멋있다."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너도 날개가 있잖아? 못할 이유가 어디 있어?"


"아니야. 그거랑은 달라. 난 날아도 나무 줄기 사이로 날아다니는 게 전부잖아."


물론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뱀이 마을 근처까지 다가온 적도 있었고, 폭우가 내려 모아 둔 먹이가 쓸려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딱 그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보기 충분한 정도였죠.



-쿵쿵-


"거기 누구 없어요? 좀 도와주세요."


나는 부스스 일어났습니다. 형은 아직 자고 있었죠. 누군가 잎사귀로 된 입구를 격하게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문을 열어 보니 모르는 다람쥐였습니다.


"람이구나. 엄마는 아직 자니? 지금 숲 동쪽에 불이 났는데, 현이 아직도 안 돌아왔어. 어머니 좀 깨워 줄 수 있겠니?"

어디선가 짙은 연기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갔던 숲 동쪽에서 불꽃이 맹렬히 피어오르고 있었죠. 산불. 아마 산불이 일어난 모양이었습니다. 산불은 그 밤톨이 있던 숲을 지나 우리 마을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형! 형. 일어나! 산불이야. 현 누나가 아직 안 돌아왔어."


"엄마! 엄마!"


평화롭던 우리 집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엄마와 형은 그 다람쥐를 따라 현을 찾으러 숲으로 가고, 누나와 나는 모아 두었던 식량을 땅 깊숙이 파묻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숲에서 보았던 현(晛) 생각이 계속 났습니다. 누나에게 물었습니다.


"나도 따라가면 안 돼? 현 누나가 어디 있는지 안단 말이야."


"절대로 안돼. 그러다 너도 불에 휘말리면 어쩌려고. 넌 여기서 밤이랑 도토리나 빨리 챙겨."


하지만 전혀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 절벽은 구석진 데 있어서 형도 찾지 못할 것이 분명했거든요. 결국 난 옮기는 것을 그만두고 숲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야! 嵐! 어디로 가는 거야?"


누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습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을 향해 달렸죠. 열기가 뜨거웠지만 그래도 앞을 볼 수는 있었습니다. 발에 가시가 박히고 상처가 났지만 마침내 예전에 현 누나를 보았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구석에 있는 절벽을 발견하고 바로 뛰어내렸죠.


"누나? 들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질렀습니다. 그럴수록 매캐한 연기만 입 속으로 밀려들어 정신이 흐려졌죠.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달궈진 장작 더미에 깔린 현(晛)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직 의식은 있었지만 완전히 깔린 탓에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람! 나 좀 도와줘. 밤을 찾다가 깔렸어."


나는 온 힘을 다해 장작 더미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 때문에 손 앞부분이 타고 말았지만 누나는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습니다.


나는 달리면서 말했습니다.


"누나, 마을이 이쪽 방향이 맞는 거지?"


"당연하지! 이 길을 수십 번도 더 다녀 봤는데."


"그런데 왜 앞에 빨간 벽이 있어?"


우리는 멈춰 섰습니다. 분명 마을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제는 오로지 붉은색으로 가득한 공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 불길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형체도 알 수 없는 시커먼 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내가 태어난 굴은 물론이고 이정표 역할을 했던 큰 나무까지 모조리 타고 없었습니다.


설마. 가족들까지 저 벽에 갇혀버린 걸까요.


"우리 누나가 저기서 기다리고 있어. 어떻게든 돌아가야 해."


저는 불길을 향해 돌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현(晛) 누나가 저를 끌어안으며 말했습니다.


"바보야. 저기 들어가면 죽어. 누나는 이미 도망쳤을 거야. 숲으로 돌아가자. 형이랑 엄마가 찾으러 갔다며?"


우리는 다시 돌아가려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밤송이 가득했던 숲 역시 불타는 중이었습니다.


"누나, 이제 어떡해? 우린 어디로 가?"


내가 물었습니다. 누나는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기에 답이 없었죠. 앞뒤로 오는 불길은 도망갈 길을 모두 막아버렸습니다. 그 일렁임으로 털이 타려는 찰나, 하늘에서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나기였습니다. 괴물처럼 전진하던 불은 딱 우리 앞에서 죽은 듯이 쓰러졌고 우리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람. 일어나."


얼마나 지났을까요. 다시 해가 떠오르고 아침이 밝았습니다. 저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제의 기억이 너무 생생했던 탓에, 그저 꿈이라고 믿고 싶었죠. 하지만 현 누나는 어디서 구한 지 모를 물을 뿌리며 저를 끝내 깨웠습니다.


"엄마는 어디 있어? 형은? 누나는?..."


저는 누나에게 매달리며 물었습니다. 누나는 대답 대신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늘을 가렸던 푸른 나무들도, 뱀도, 다람쥐도 청설모도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지만, 땅에는 시커먼 가루들만 날릴 뿐이었습니다. 어제까지 밤을 삶아 먹고 있었는데, 꿈보다도 믿기 어려운 것이 오늘이었습니다.


나와 현은 희망을 가지고 불탄 마을을 뒤적였습니다. 하지만 혹시 나는 역시나였죠.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다람쥐의 뼛조각을 찾아낸 누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이거, 우리 오빠 뼈야. 이 상처를 알아."


"누나..."


누나가 얼마 남지 않은 털 뭉치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누나를 끌어안았습니다. 더 둘러보다가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한참을 걸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새카맣게 타 버린 폐허뿐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지쳐 쓰러졌고, 지나가던 한 나이 든 인간에게 구출되어 옮겨졌습니다.



"아유, 불쌍하기도 해라. 다 탔네."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저께 뒷산에 난 산불에 휘말린 모양이구려. 우리가 키워 줍시다."


"뭘 그렇게 해요? 원래 자연에 살던 것들인데. 일단 먹이랑 물 좀 주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하면 될 것 좋을 것 같구먼."


"자네는 못 말리겠구먼. 뜻대로 하소, 허허."



다시 아침이 되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털도 말끔해져 있고, 그을린 상처도 다 나아 있었습니다. 눈앞에는 먹음직스러운 호두 조각들이 놓여 있었죠. 꿈이었을까요? 조각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누나가 말렸습니다.


"아까 인간이 놓아주고 간 거야. 독약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너까지 잃을 순 없어."


하지만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내가 정신없이 먹는 걸 본 누나도 이내 경계를 풀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먹다 보니 한 나이 든 인간이 찾아왔습니다. 누나는 먹던 걸 멈추고 얼른 저를 감쌌습니다.


"아직 겁이 많은 모양이구나? 걱정 마렴, 해치지는 않는단다."


인간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당장 해코지하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긴장이 풀린 우리는 최대한 많이 먹고 길을 나섰습니다.


"빨리 먹고 가자. 언제 공격할지 모르니까."


누나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누나는 경계심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누나는 어렸을 때 산불을 본 일이 한 번 더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살만 한 동굴이나 나무 구멍을 찾아다녔습니다. 마침 적당한 높이에 딱따구리가 파고 남은 구멍이 있었는데, 그 뒤로도 다른 동물들이 썼는지 안은 제법 넓었습니다. 거기에 마른 잎이나 깃털을 채워 넣어 아득하게 꾸몄습니다. 조금 엉성했지만 전에 살던 집과 비슷했죠.


마음씨 좋은 인간들은 우리 눈에 띄는 곳에 먹이통을 놓아두었습니다. 덕분에 먹이가 귀한 겨울이나 초봄에도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었죠. 집의 모양새도 거의 갖추어져 하늘다람쥐 부부가 사는 집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이웃들도 많이 만나고, 산불의 기억도 점차 아물어가 예전처럼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누나는 여전히 침울한 표정이었습니다.


"누나,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담고 있는 거야?"


내가 물었습니다. 누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슬픈 게 뭔지 알아?"


"?"


"나에게 추억을 선물해 준 존재가 다시 추억으로 돌아가는 거야. 네 형이랑 우리 가족. 집. 그런 거. 잠에 들기만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매번 불길이 그걸 삼키는 악몽을 꿔."


"그래도 네가 있으니까, 다 없어진 건 아니야."


누나의 슬픔은 새 하늘다람쥐들이 태어나고 나서야 사그라들었습니다. 아기 다람쥐들의 웃음이 슬픈 기운까지 가시게 한 것이죠. 가끔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늘 기쁜 얼굴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 있어?"


"나, 저 인간들하고 말이 통하는 것 같아.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 위로받는 기분이야."


"진짜? 그럼 나도 데려가 줘."


"안돼. 내가 없으면 넌 애들 봐야지."


"아."


하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저녁 무렵 누나가 잠든 틈을 타 그 집으로 날아갔습니다. 과연 할아버지 한 분이 먹이통 앞에 나와 계셨습니다. 저도 가만히 서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람쥐들아, 안녕. 사실 우리는 외로웠단다. 자식들도 다 떠나서 이제 찾아오는 사람도 없거든. 가끔 경로당에서 장기를 두거나 하는 게 전부란다. 너희라도 찾아오니 기분이 정말 좋구나."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미소를 짓는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누나가 말한 것이 이해가 되었죠. 나는 호두 한 알을 집어서 그 할아버지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나에게 주는 거니? 정말 고맙구나. 여보, 이리 좀 와봐. 이 작은 것이 나한테 선물을 줬어."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새끼들이 수 차례 독립하고, 지난가을에 낳은 새끼들도 이제 첫 먹이 사냥을 나갈 무렵이 되었습니다.


"엄마, 진짜요?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먹이를 줘요?"


"그럼, 그런데 그냥 주는 게 아니란다. 우리가 그 사람들이랑 교감을 하는 거야. 우리느 그들을 쳐다보고, 그러고 있으면 미소를 띠고 우리에게 먹이를 주지."


"저도 따라갈래요!"


"넌 아직 어려. 다음 달이나 같이 가 보자꾸나."


저도 누나도 어느덧 나이가 제법 들었습니다. 그렇게 반짝거리고 윤기 나던 털은 좀 빠지게 되었고, 날아다니는 것도 예전만큼은 못하게 되었지요. 그래도 누나의 반짝이는 눈만큼은 예전과 다름없었습니다. 이제 봄날의 예쁘장한 모습은 없어졌지만, 인자한 미소와 여유로움이 찾아왔습니다.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결같았죠. 우리보다 나이를 천천히 먹는 모양이었습니다.


맑은 날이면 새끼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갔습니다. 예전에는 천적이 많았지만, 이쪽 숲은 뱀들이 그렇게 많이 살지 않아서 아이들에게 구경시켜 주기 좋았거든요. 할아버지의 밭에도 새 작물이 늘어났습니다. 고추나 파, 양파 같은 것 말입니다. 아이들이 밤에 몰래 따먹으려 나갔지만 우리는 절대 하지 못하게 말렸습니다.


"어린잎까지 따 먹으면 안 돼. 너희 자식들도 먹을 게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렇게 말하면 이내 시무룩해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습니다. 다시 평화로운 나날이 반복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나는 매캐한 냄새에 바로 정신이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나와 누나의 모든 것을 앗아 갔던 그 냄새. 산불 냄새였습니다.


"누나! 누나, 당장 일어나!"


"람? 왜... 급한 일 있어?"


"산불이라고. 그게 다시 찾아왔어"


나는 온 힘을 다해 누나를 깨웠습니다. 산불이라는 소리에 누나의 동공이 커다래졌습니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습니다. 우리는 자고 있던 아이들을 다 깨웠습니다.


"얘들아. 일어나. 지금 당장 떠나야 해."


누나가 외쳤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산불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던지라 아이들은 모두 불이 번지지 않은 곳으로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 너무 어려서 날아가지 못하는 아이가 문제였죠. 어떻게 할지 몰라 허둥대는 동안 비명이 들렸습니다. 그 노부부가 사는 집 방향이었죠.


"누나. 가서 확인 좀 해줘. 얘는 내가 업고 내려갈 테니까."


저는 아이를 업고 강 건너 안전한 곳에 내려놓았습니다. 다시 돌아와 보니 나무는 흔적도 없었죠.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불길이 사람들이 사는 집을 덮치는 것이 보였습니다.


"람, 이 사람들 깨우는 것 좀 도와줘."


현 누나가 열심히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이었을까요, 그 둘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작은 호두 껍질을 주워다가 물을 담고, 그걸 뿌리기를 반복했죠. 한참을 하다 보니 할아버지가 깨어났습니다.


"저기 좀 보세요! 불이 코앞까지 왔다고요!"


그는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죠. 그들은 낡은 트럭을 타고 빠르게 빠져나갔습니다.


"정말 다행이다. 그렇지?"


누나가 마지막으로 그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우리도 집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입구가 막혀 그럴 수 없었어요.


"애들은 다 나갔어?"


"내가 데려다줬어."


"이리 와. 곁에 있자."


우리 둘은 매캐한 연기 속에서 점차 의식을 잃어 갔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생각했어요. 불은 정말로 위험하다고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로도 숲 전체를 태워 버릴 수 있다고요.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요.


늑대가 토끼를 잡아 먹는 일은 불쌍해 보이지만 자연의 이치에요. 그래야만 동물들이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산불은 그렇지 않아요. 어떤 순기능도 이치도 없는 순수한 파괴 행위니까요. 실수로 낸 불에 수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죽어요. 이런 일은 정말이지 없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정신이 드냐?"


"아빠? 두식 삼촌? 엄마? 어떻게..."


"너희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우린 그때 산 아래 마을 가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집이 불타고 있지 뭐냐. 두식 삼촌이 너희를 발견했지. 두식 삼촌은 워낙 똑똑한 다람쥐라 금방 덫에서 빠져 나왔다. "


"와,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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