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고래는 그대로 바다로 떨어졌다. 고래의 팔과 머리가 수정이 되어 떨어져 나가고, 수정 배 역시 산산조각이 났다. 그들은 어느 순간 모두 물로 변해 나와 바다 생물을 감쌌다. 거의 동시에 바다 생물의 기억이 불현듯 내 머리에 공유되었다.
물과 기름이 처음 만나던 순간이었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두 바다는 서로 섞일 수 없었다. 물은 아래로, 기름은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물은 생각이 많았지만 기름은 그렇지 않아 늘 가벼웠다. 그 점이 둘을 만나게 한 것이다. 물이 침울해 있을 적이면 기름이 저 높은 곳을 보고 돌아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심각한 생각에 자주 빠져 있던 물은 기름을 만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릴 정도였다. 밀도의 높도 낮음이 그렇게 어루러졌다.
둘은 잘 만날 수 없었지만, 공기 방울을 만들어 위로 보냈다. 말하자면 답을 한 것이다. 기름은 거기에 자신을 조금 떼어 주어 가라앉게 했다. 이것이 그들의 사랑이었다. 본래 기름과 물은 섞이지 않는 것이나 한 방울씩, 아주 작은 알갱이로라면 섞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름은 때가 되어 타 없어지고 말았다. 바다 생물 속 기름 방울들은 모두 압력을 받아 수정 조각으로 변했고, 바다 생물은 살아있다고 하기도 힘들 정도의 우울과 적막에 휩싸였다. 내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신이 드니?' 수정이 말했다.
물의 끝에는 궁전 같은 구조물이 서 있었다. 마치 혜성의 꼬리를 보는 듯했다.
‘여기가 당신의 집인가요?’
내가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저…. 괜찮으세요?.’
나는 수정을 조금 문질러 보았다. 그런데 수정에 작은 금이 가더니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어찌해 볼 여유도 없이 가루가 되어 물에 녹아버린 것이다. 결국 고대의 우주에서 혼자가 되고 말았다.
‘금붕어 채!’
주머니에 연구실 수조에서 쓰고 남은 채가 있었다. 그걸로 물속을 휘저어서 조각을 찾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몇 시간을 뒤져도 투명한 보석 조각뿐이었다. 그 수정들은 빛나고 있었지만 내가 찾는 종류는 아니었다.
‘난 거기 없는데’
‘세상에’
그건 더 이상 수정 조각이 아니었다. 머릿결 뒤로 우주가 비치는 푸른 사람이 서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보통의 은하나 혜성보다도 아름다웠으리라. 나중에 학계에 발표라도 하면 분명 큰 반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정이 풍기는 분위기는 그런 생각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네게 조금 더 익숙한 모습으로 바꿔봤어. 이제 잡을 수 있지.’
그 수정 조각, 아니 푸른 사람은 내 손을 잡았다. 돌과 물의 중간쯤 되는 차가운 감촉이 손에 느껴졌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건물이 열리면서 숲 같은 것이 나타났다. 수정은 내 손을 잡고 숲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에는 별처럼 빛나는 열매들이 가득 열려 있었다. 수정이 열매를 하나 따다 주었다.
‘이건 별이 태어나는 순간’
열매는 입 안에서 불꽃처럼 튀었다가 사라졌다. 용암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입을 막아야 했지만, 신기한 맛이었다. 다른 건 씹기도 전에 이가 시리고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하지만 어딘가 슬픈 뒷맛이 있었다.
‘저 어딘가에서 홀로 죽어간 백색왜성의 열매야. 난 가끔 울적해지면 그 열매를 씹어. 그럼 그 별의 슬픔을 온전히 느낄 수 있거든.’
‘그 열매를 몇 번이나 먹었나요?’
‘일만구십사 번’
일만구십사 번. 사람으로서는 매일 먹어도 불가능한 숫자였다.
수정이 말했다.
‘네가 온 세상에 대해 알려줘. 이 우주는 좁아서 이미 다 둘러보았거든. 너희로 치면 아직 아기 같은 거니까. 내가 보고 들은 게 모여 이 숲과 열매를 만들어 가는 거야. 난 이 숲을 더 키우고 싶어. 넌 별을 보는 사람이니까, 아는 것도 많지?’
'이 숲은 아까 것이랑 다른데요.'
'내가 혼자가 된 이후로는 생각이 많아졌어. 다른 바다에게 주어야 할 이야기들이 모두 내 안에서 굳어버렸지. 그게 이 숲이야. 들을 사람 없은 이야기들이 모인 곳'
'그 새들은 무었이였나요?'
수정은 다만 말이 없었다. 그저 까마득한 바다와 하늘을 응시할 뿐이었다.
숲의 한 구석에는 아주 날카로운 수정 가시가 박혀있는 부분이 있었다. 거긴 필시 그리움을 떠올린 곳이리라. 너무 어두워서 갈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수정 속에 숨은 기름 방울을. 그 날카로움 속에도 추억이 서린 모양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