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시절의 나도 지금의 나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by 원석


하늘을 좋아한다. 특히 비 온 다음 날 하늘을 무척 좋아하는데 선명한 파란색과 동화 같은 구름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참 좋다. 그저 하늘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어릴 적엔 비오기 전 잔뜩 먹구름이 낀 스산한 날씨를 좋아했다. 싸늘한 바람과 구름에 가려 채도가 낮아진 도시의 풍경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날이면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고 종로에 간다. 딱히 목적이 있어서 가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게 사람 많은 곳에 가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돈이 조금 있으면 자주 가는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거나 햄버거 가게 가서 햄버거 세트를 시켜 먹었는데 그 소소한 기쁨을 참 좋아했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가는 곳이 두 군데 있었다. 뮤직랜드와 낙원상가. 90년대 종로 파고다 공원(지금은 탑골공원) 건너편 빌딩 지하에 뮤직랜드라는 곳이 있었는데 정말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벽에 진열된 수많은 테이프와 CD들, 청음을 할 수 있는 헤드폰 그리고 천장 곳곳에 설치된 CRT 브라운관. 화면에서는 쉴 새 없이 해외 밴드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당시 헤비메탈을 좋아했던 나는 새로 나온 음반이 없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전설적인 밴드들의 음반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때 당시 뮤직랜드는 정말 핫한 곳이었다. 그리고 뮤직랜드를 나와 바로 옆 종로 2가 사거리에 가면 다이나톤 매장이 있었는데 전시된 다양한 키보드를 연주해볼 수 있어 거기도 참 자주 갔더랬다.


그리고 가는 곳이 낙원상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정말 낙원 같은 곳이다. 듣기로는 전 세계에서 이렇게 악기와 장비를 파는 곳은 이곳이 유일무이하단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던 나는 낙원상가에 가도 가끔 드럼 스틱이나 사지 비싼 일렉기타는 엄두도 못 냈다. 늘 아이쇼핑을 하며 '이런저런 악기들이 있구나. 이건 얼마, 저건 얼마 하네. 나중에 꼭 사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장밋빛일 것만 같은 미래를 막연히 기대하며 행복해했었다. 정말 말 그대로 행복했다. 비록 돈은 없어서 구경만 해야 했지만 그래도 서울에 사니 그런 곳도 가볼 수 있고 실컷 구경이라도 할 수 있으니 그것만 해도 행운이다 싶었다.


그렇게 음반과 악기를 보며 행복해했던 10대의 내가 있었기에 아직까지 음악의 끈을 놓지 않고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그러고 보면 스산한 날씨가 그 시절의 내게 영향을 많이 미쳤던 것 같다. 화창한 날씨에 종로에 가는 것도 물론 좋아했다. 그런데 스산한 날의 느낌은 이런저런 상상을 더 하게 만들었고 왠지 나도 언젠가는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그 시절. 지금이야 그게 너무너무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만약 다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또 그렇게 스산한 날씨에 종로를 가고 그렇게 꿈을 꾸며 살 것 같다. 심지어 미래의 결과를 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인생을 더 살아 보니 그 시절에만 느꼈던 감정이야말로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보이는 물건이야 어떻게든 살 수 있겠지만 그 시절 행복했던 순간을 어떻게 다시 살 수 있을까. 그 시절이 소중했던 것처럼 나의 오늘도 행복한 순간순간이 있지 않았나 돌아본다.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 이렇게 새벽에 글을 쓰는 순간, 이제는 좋아하고 필요한 건 좀 무리를 해서라도 살 수 있는 환경, 아직 이렇게 지난날을 추억하며 미소 지을 수 있는 마음. 이제는 스산한 날씨보다 화창한 날씨를 좋아한다. 달리는 차 안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네 식구가 한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화음도 넣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한적한 카페에서 좋아하는 커피와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언젠가는 다시 살 수 없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제 곧 50대가 될 나의 40대를 이렇게 기록한다. 지금을 잘 기억하라고. 그리고 내일을 잘 맞이하라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왜 꼭 아파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