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석 Sep 14. 2021

잡채가 잡채 했다

그래서 만들기 더더욱 힘든 잔치 요리


아내가 아픈 뒤 식사 준비는 내 몫이 되었다. 가끔 스파게티나 고기 볶음 정도 할 줄 알던 내가 가족의 식사를 책임져야 한다니. 해야 하니까 하지만 부족한 실력으로 만들 음식을 생각하니 가족에겐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식사 준비. 투병 중인 아내에겐 영양이 골고루 균형 잡힌 음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암 환자에게 좋은 음식' 책도 사 보았지만 어디 그렇게 만드는 게 쉬운 일인가. 멋지게 데코 된 음식 사진을 보고 있으면 걱정이 앞선다. 이런 수준으로 만들 수 있을까. 맛은 제대로 날까. 걱정은 결국 포기로 이어진다.


얼마 전 장모님께서 갈비탕을 만들어 주셨다. 사위가 음식 만드느라 고생인 걸 아시기에 장모님께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찌개며 국거리며 반찬 등을 공수해주신다. 워낙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가족 모두 맛있게 먹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갈비탕을 해주셨다. 먹다 보니 당면을 넣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고 집 앞 마트에서 당면을 사 와 넣어서 먹었다. 그러다 '먹고 남은 당면이 꽤 되어 이거로 잡채나 할까?'라고 생각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내 요리 수준과는 한참 먼 잡채를 만들게 됐다. 며칠 후 장을 보러 가서는 당근, 버섯, 잡채용 고기를 사 왔다. 그리고 어제, 저녁 준비를 위해 좀 이른 시간인 5시부터 잡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역시나 레시피는 만개의 레시피. 재료를 다듬고 썰고 재고 무치고를 반복, 마지막으로 당면을 삶았다. 콩기름 한 국자, 간장 한 국자를 넣은 끓는 물에 미리 불려놓은 당면을 넣었다. 아, 당면을 이렇게 삶아야 면에 맛이 배는구나를 깨달았다. 먹을 때는 잡채가 맛있네 마네, 싱겁네 짜네 하면서 미식가인 척했는데 이제야 만든 이가 얼마나 정성스레 만들었을지 공감이 갔다. 내가 덤빌 요리가 아니었다.


완성된 잡채


면을 다 삶고 물을 버리고 미리 준비해둔 재료를 섞어 볶아야 하는데 면이 뭉쳐 쉽지가 않았다. 다시 큰 양푼에 넣고 젓가락으로 비비는데 이것도 쉽지 않다. 비닐장갑을 끼고 뒤집었다. 내 손도 뒤집어졌다. 너무 뜨거워 손을 급히 뺐다. 그리고 잠시 식기를 기다렸다가 간장과 올리고당으로 간을 맞추고 마무리했다. 다 만들고 나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해냈다는 즐거운 마음과 이렇게 어려운 요리였어? 하는 뒤섞인 웃음이었다. 이제 저녁을 차리고 아내와 아이들과 식사를 했다. 항암 5차를 힘겹게 버티며 이겨내고 있는 아내는 요 며칠 미각이 좀 약해지고 속도 좋지 않은 상태다. 그래도 남편이 힘들게 한 요리라고 맛있게 먹어 준 아내가 안쓰럽고 고마웠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부족할 텐데 남편의 좌충우돌 음식을 먹는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잡채가 잡채 했다. 잡채를 만들며 내 실력과 상관없이 잡채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컸다. 왜 잡채가 잔치집에 빠지지 않는 요리인지 깨달았다. 여러 재료가 들어가 서로 어우러지고 섞이고 어떤 것은 아삭하고 어떤 것은 물컹하고 어떤 것은 쫄깃하며 어떤 것은 감칠맛이 나는 이 조화로움이 잡채의 매력 아니던가. 잡채에는 잔치집의 모든 사람이 서로 즐겁고 한데 어우러지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있다. 우리 가족도 언젠가 아내의 투병이 끝나고 건강을 회복하는 날, 한데 어우러져 잡채처럼 감칠맛 나게 살기를 바라본다. 아니 지금도 우린 잡채처럼 서로 맛있게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완성된 맛은 아니어도 완성되어가는 맛도 맛있는 것 같다.


#잡채 #저녁식사

작가의 이전글 오! 참치찌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