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캔줌마 Aug 22. 2023

2. 캐나다 치기공사로 거듭나기.  그 성장통

처음에는 캐나다 취업에 있어 내 분야 이외에 또 하나의 옵션을 가지려고 치기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조건과 환경 등을 고려했을 때 취업의 가능성은 치기공 분야가 더 높아 보였다. 이것이 보건/의료 분야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나의 영역인 애니메이션 분야의 경우 구인공고 보면 회사들이 거의 밴쿠버, 토론토에 90%, 몬트리올에 10% 정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대도시에만 분포해 있었다. 누가 대도시에 살고 싶지 않아서 안 사나. 주거비가 비싸서 못 살지. 그런데 치기공소는 치과가 있는 곳이라면 다 있다. 작은 도시에도. 물론 대도시가 숫적으로 더 많고, 소도시가 숫적으로 더 적기는 하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장단점이 있었다.


대도시는 자리도 많이, 자주 나오지만 인구가 많아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보수 등 대우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고, 소도시는 자리가 가끔 나와 기다리는 시간이 길 수는 있지만 사람을 구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실력이 조금 모자라도 채용될 확률이 높고 대도시보다 대우도 좋다고 했다. 나 같이 대도시 주거비가 비싸서 중소도시로 가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장점이었다.


수업은 크게 이론, 캐드(CAD) 디지털 실기, 모델작업이나 왁스업(Wax Up) 등 수작업 기초 실기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론 수업은 치아의 구조, 형태학, 기능적 이론을 배우며 그 용어들을 익히는 등이었는데 기본적으로 기공소에서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이론의 내용에 대해 깊이 있게는 모르더라도 치아의 번호라든지 각 부분의 명칭이라든지 기초적인 것들은 숙지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가뜩이나 현장에서 의사소통을 영어로 해야 하는데 용어를 모르고 있다면 알아듣기 더 힘들 것 같다. 캐드 수업은 실제로 기공소에 의뢰되었던 과거 케이스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캐드 소프트웨어는 독일 회사에서 개발한 엑소캐드(Exo Cad)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프로그램 진행이 마법사 기능처럼 순차적으로 진행되도록 되어있어서 굉장히 쉽게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자체를 다루기 위한 학습은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캐드상에서 어떻게 치아를 디자인할지 개념과 이론적 토대를 갖기만 하면 디지털로 적용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런 개념과 이론적 토대를 갖추기 위해 수작업으로 왁스 치아를 만들어보는 왁스업 등이 병행되었는데 이것 또한 나에게는 너무나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마디로 치아를 모방하는 작은 소조 작품을 만드는 것인데 재료가 왁스와 전기인두, 치과용 조각칼인 셈이었다. 내가 왁스업으로 치아를 만들 때마다 선생님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런데 이렇게 배우는 것이 재미있고, 칭찬을 받을수록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심해지는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 스트레스의 정체가 무엇일까 며칠을 곰곰 생각해 보았더니 그것은 실패감과 좌절감이었다. 


아니, 잘해서 칭찬까지 받는데 무슨 좌절감?
 

치기공에서 재능을 인정받는다는 단편적인 상황은 '나라는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는 장기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될 수 없었다. 이민을 위해 내 분야가 아니었던 치기공을 열심히 배우고 칭찬받고 한다는 것은 반대로 보면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만화가'를 장래희망으로 삼기 시작한 이후 마흔이 되도록 평생에 걸쳐 열정과 야망을 불태웠던 나의 분야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포기는 곧 실패였고, 실패로 인한 좌절감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돌이켜보니 이때부터 이민 1세대로서의 고통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스트레스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되었으나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현실이 이렇다면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평소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현실적이고 사고형의 특징을 가진 나는 나에게도 평소와 같이 대했다. 나는 나의 감정에 공감하며 위로하지 않았고, 늘 그랬 '해야 되면 하는 거다'라며 앞으로 나아갔다.


수업이 시작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학원 출신으로 먼저 캘거리에 취업해 계신 분이 본인이 근무하고 계신 회사에서 인력을 충원하려 한다고 원장님한테 연락을 해왔다고 했다. 학원에서는 아직 기초반 과정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그쪽에 지원서를 내보자고 하셨다. 그러면서 선생님들이 나에게는 포트폴리오를 위한 특별 과제로 주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전치(앞니)들을 왁스업으로 만들어 오는 것이었다. 신입들일수록 겉에서 잘 보이지 않는 어금니들 위주로 디자인하고, 앞니들은 겉에서 잘 보이기 때문에 디자인에 있어서 매우 까다롭고 조심스러워 실력 있는 경력자들이 다루게 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아쉽게 다른 사람을 채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배운 것도 없이 캘거리로 그냥 날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수업은 계속되었고 한 달 반이 지나 3개월 과정 중의 절반인 Part 1이 마무리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1. 아줌마. 캐나다 가서 치기공사 되기로 결심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