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선례는 다만 앞서 있었을 뿐 선한 예와 다르다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으며 잘못된 선례를 바로잡아야 한다.

by 가가책방

저런 데 누가, 어떻게 길을 만들었을까 하고 놀랄 때가 있다. 오래전 그곳을 반드시 지나가야만 했던 사람들이 만들었을 길. 자신들뿐 아니라 자신들 다음에 올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편하게 지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을 길. 그 길은 앞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선하기까지 하다.

선례(先例)라는 말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첫째로 이전부터 있던 사례, 둘째로 전례로 순화되었음, 셋째로 법률 상 일정한 판결에 나타난 취지나 원칙을 그 후의 판결에서 답습하는 경우, 앞의 판결을 이르는 말이라 풀고 있다.


앞서 누군가 만들었을 험지에 있는 좁은 길처럼 선례는 그 이후의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사결정을 간결하고 신속하게 해주는 편리를 준다. 앞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를 살피고 정황이 유사하다면 오랜 고민이나 큰 갈등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거다. 하지만 선례는 어디까지나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경우에만 적용되어야 한다. 앞서 발생했던 문제와 유사해 보이더라도 본질적으로 다를 수 있으며, 시대 변화와 흐름에 따라 더 이상 선례를 따르는 게 적절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례는 결코 선하지 않다.


편리함이 선함일 때가 있었다. 신속한 결론, 빠른 안정.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나쁜 선례가 만들어진 배경 역시 그 편리함이다. 종종 언급하기도 하는 사례인데, 바로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명암이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선례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 나쁜 인식을 만들었다.

첫째, 친일, 반민족 행위, 이익을 위해 다른 이에게 위해를 가한 행위, 권력에 아부한 행위, 배신 등의 행위들이 이익을 보장한다면 선택했을 때 나쁠 게 별로 없다는 인식이다. 물론 이런 인식이라는 게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에서의 인식이기에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 한 보수 언론사는 오래전부터 '과거 일은 잊고 미래를 생각하자'라고 거듭 말해왔다. '언제까지 지난 일을 붙잡고 해결하느니 마느니 하면서 앞으로의 논의 진행을 멈출 거냐'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친일파 청산에서 그랬듯, 얼마 전까지도 그런 선례를 따라 과거의 과오와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무마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우리는 안다. 선례를 따라 '좋은 게 좋은 것'이라던 단호하지 못함이 부른 비극이었다.

둘째, '모난 돌이 정 맞는다'거나 '괜히 나서면 손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가장 앞에서 독립 만세를 부른 사람은 총에 맞아 쓰러졌고,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친 결과는 구속과 모진 고문, 처참한 죽음이었다. 이후에도 나쁜 선례는 반복됐다. 잘못하고 있음을 말하는 사람은 조용히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주도면밀한 방해로 몰락했으며, 기본적인 수준의 삶조차 누리지 못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가난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자, 첫째 선례가 반복되어 받아들여진 결과 생겨난 오늘날의 해악들은 무엇이 있는가? 둘째 선례의 해악이란 무엇인가? 약간의 비약을 보태면 거의 모든 비리와 부정이 첫째 선례에서 만들어졌고, 그 비리와 부정을 일소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빼앗은 게 둘째 선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누려왔던 이들이라면 과거의 선례를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오늘은 2018년 11월 14일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적인 결정이 내려질 날이기도 하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많은 선례를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을 테고, 더 많은 선례를 만들고 있을 거다. 분기점은 항상 있다. 길이 없다 해도 지금부터 만들어 가면 되는 거다. 시대가 변하고 시민의 요구 역시 달라진다. 힘 있는 자들을 지키고, 돈 있는 자들을 위하던 과거의 선례라면 과감히 깨뜨릴 필요가 있지 않은가.


잘못을 했어도 칭찬받아온 아이는 그 일, 행동, 생각이 잘못인 줄 모르게 되는 법이다. 오히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위험을 키우며, 벌을 받게 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알거나 뉘우칠 수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이든 처음부터 치명적인 악을 품고 태어나지 않는다. 타인을 속이고, 비방하며, 때리고, 괴롭히며, 누명 씌우고, 무고하는 일들도 처음에는 작은 장난, 놀림이 시작이었으리라. 가깝고 먼 누군가가 거듭, 일관성 있게 올바른 선례를 제시하고 잘못된 선례를 바로잡아줬다면 악이 치명적인 수준에 이르기 전에 잘못을 알게 됐으리라.


정의가 승리한다거나 선함이 제일이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작은 선은 꾸준히 이루기 어렵고, 큰 악으로 나아가는 건 의외로 간단한 게 현실이다.

적절한 말을 찾다 <공자> 속 한 구절이 떠올라 적어본다.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 :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뜻을 같이하는 이가 있다.


친일파의 선례를 보면 알 수 있듯 저항은 크고 강하며 모질다. 그 저항에 저항해서 바로 잡아가기 위해서는 더 크고, 더 강하며, 더 모질어져야 한다. 나는 가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종종 인내심을 가지라고 하면 지금 이 상태에서 그저 참고 견디라는 의미냐고 되묻는 이가 있다. 물론 그런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인내심을 갖는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행위다. 꾸준히 힘을 쏟고, 목소리를 내며, 지켜보고, 행동해야 한다는 거다.


나의 생각, 우리의 행동이 좋은 예로써 선례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시대착오에 근시안적인 소동에 그칠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지금처럼 나의 자리에서,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를 내며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계속할 뿐이다.


우리 앞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우리가 선봉이고, 우리가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좋은 예를, 선한 예를 남겨야 할 책임이 크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갈 길은 멀다. 함께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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