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책방 로컬 로망스
뭐든 유심히 살피는 편이다.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는 조언도 자주 듣는다.
종종 그렇게 살펴보는 건 실례라는 충고도 듣는다.
그럼에도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살피고, 정보를 모으고, 수정하고 다시 살피기를 반복하는 일이 있다.
예를 들면, 길냥이의 족보를 추측하는 일이 그렇다.
지난해, 2019년 3월부터 1년 동안 만나고 지켜본 길냥이들이 있다.
색깔도 다르고, 체형도 다르고, 몸집도 크거나 조금 왜소하거나 제각각처럼 보이는 길냥이들.
얼마 전까지는 특별히 관계가 '어떠하다'라고 공공연히 밝혀진 냥이들 말고는 다 남남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최근 그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부쩍 자주, 떼 지어 찾아오는 치즈 냥이들. 노랑이들을 유심히 보기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아파서 '아야'라고 이름 붙인 냥이와 '아야'에게만 유독 다정해서 '다정이'라 부르는(실은 동네 깡패라서 보이는 냥이란 냥이는 다 때리고 다닌다) 삼색이는 모녀 관계로 알려져 있다. 정말 닮은 데를 찾아볼 수 없지만(아야는 카오스, 다정이는 삼색이, 아야는 작고 마른 편, 다정이는 크고 통통한 편) 그렇게 다정할 수 없는 모습에 납득했던 관계다.
사이좋게 몰려다니는 사총사가 있다.
털 빛깔도, 무늬도 제각각이라고 생각해서 얘들은 왜 이렇게 친하지 싶던 미스터리의 주인공들.
그런데 자주 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유심히 살피다 발견한 게 있다.
눈매의 유사함이다.
왠지 비슷비슷하다고 느껴왔는데, 자꾸 보다 보니 왠지 인상이 닮아 보인 거다.
또 하나는 미간의 무늬 패턴이다.
색은 달라도 패턴이 유사하다.
물론 고양이들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고양이들은 색은 비슷해도 털 패턴이나 표정이 완전히 달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녀석들은 실제로도 별로 친하지 않다.
오래 들여다보고, 유심히 살핀 결과 내린 결론은 사이좋은 사총사가 혈연관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믿거나 말거나, 동의하거나 말거나, 앞으로 사총사를 형제자매라고 생각하고 대할 생각이다.
길냥이들이 닮은꼴이라거나 혈연관계일 거라는 얘기가 결론은 아니다.
서울에서도 고양이를 보면 반가웠고, 종종 간식을 주거나, 밥을 대신할 무엇을 주면서 친해지려고 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과는 질적으로 다른 관계에서 벌인 일들이라 무게가 다르다.
때로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고, 아프거나 위태로워 보이는 길냥이를 보호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갈등한다.
살아 있는 건 식물이거나 동물이거나 잘 키우지 못해서 해를 끼치고 마는 성향인 데다 자신도 없어서 더 그렇다.
가까워지고 싶고 더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애써 거리를 두려고 하는 건 오래 소중히 여기고 싶어서다.
소중한 무엇, 어떤 존재를 잃어버리는 경험은 적을수록 좋다.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을 때 더 사랑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믿는다. 내겐, 길냥이가 그런 존재 중 하나인 거고. 그래서 거리를 둔다.
유심히 살피다 보면 이름을 붙이게 되고, 이름을 부르다 보면 정이 들고, 애틋한 마음이 솟아서 집착처럼 죄의식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죄의식.
이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직은 적당한 책임감이라고 바꿔 적을 수도 있다. 소중한 존재에게는 그 소중함만큼의 책임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책임감. 겁이 많다면 꼭 기억해야 하는 부분.
정말 마음 착한 어떤 분에게 구조된 아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2주일은 입원한다고 했는데, 비용을 떠나 나는 아야를 구조하지 못했다.
하지만 매일 아야를 생각한다.
아야가 머물던 집을 매일 들여다본다.
문 앞에서 소리 내 울던 시간과 울음소리를 떠올린다.
혼자라서 외로워 보이는, 봄바람이 따뜻해서, 봄볕이 포근해서 더 쓸쓸할지 모르는 다정이를 평소보다 한 번이나 두 번쯤 더 불러보기도 한다.
그냥 이런 정도다.
아야가 돌아오면 특별히 아야를 위해 사둔 사료를 꺼내 줘야지.
그저 그런 마음으로 책방 문을 열 때마다 아야의 빈자리를 들여다보는, 고작 그런 정도다.
#길냥이 #닮은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