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나무토막을 추억하다
며칠 전 나무토막을 잃어버렸다.
별 것 아닌, 40센티짜리 나무토막이다.
다른 이야기에서 슬쩍 짤막한 에피소드로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깟 나무토막.
그런데 돌아보니 이 나무토막은 가가책방 이야기의 너무 많은 장면에 등장하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잃어버렸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느낀 허전함과 화남의 이유를.
나무토막과 가가책방 이야기를 회상하며 나름 내린 결론이 있다.
쓸모를 찾지 못하면 사라지기 마련이며,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면 잃어버리기 쉽다
그 나무토막들은 많은 것이 '될 뻔'했다.
그러나 되지 못했다.
조금 생각해보면 사람도 다르지 않다.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면 스스로를 잃어버린다.
쓸모를 찾지 못하면 쓸모가 없어지고 만다.
이른 아침, 의외의 깨달음을 되새기며.
나무토막과의 이야기를 추억한다.
시작.
2019년 3월 19일.
지금의 가가책방 자리를 계약했다.
그 후 한동안 재료로 쓸 목재들을 모으고 다녔다.
나무토막과 만난 건 그때다.
당시 나무토막은 공산성 맞은편, 한옥 신축 현장에서 불태워지기 위해 옮겨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길고 쓸모 있던 몸이 툭 잘려서, 일부분은 쓸모를 찾아 한옥이 되고 난 후다.
현장 소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다 가져가세요."
"내일모레까지만 가져가시면 돼요. 곧 현장을 정리해야 해서요."
폐목재의 행방이란 거의 정해져 있다.
바로 태워지거나, 펠릿 형태로 가공되어 태워지는 거다.
그때 그 나무토막을 골라서 가져온 이유는 그중에서도 길고, 단단하며, 무늬가 예뻤기 때문이다.
1미터 50센티가 조금 넘는, 묵직한, 나무토막.
그게 첫 만남에서 기억하는 나무토막의 모습이다.
가가책방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번 쓸모 있을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던 건 아까웠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쓰기 아깝고, 너무 짧게 토막 내기 아깝고, 굳이 쓸 필요 없는데 써버리기 아까워서 아껴두었다. 그렇게 공사가 끝나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다시 쓸모 있어질 뻔 한 건 한참이 지난 2019년 8월이다.
조금 특별한 탁자를 만들 생각이었다.
이상하게 무겁고, 애매하게 낮지만, 의미 있는.
처음 계획할 때는 40센티씩 자른 나무토막을 다리로 쓸 셈이었다.
그러나 자르고 보니 조금 아쉬워졌다. 그래서 다른 나무토막들을 다리로 썼다.
덕분에 더 무겁고, 거 애매한 높이의 탁자가 만들어졌다.
하나의 공정을 빼먹었는데, 탁자 다리로 쓰기 위해 네 면을 대패질했다.
대패가 잘 나가지 않는 나무 재질이라 제법 힘들었다.
자르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톱날의 흔들림을 막기 위해 톱날에 등이 대어 있다고 해서 등대기 톱이라고 불리는 걸 썼는데 톱날 깊이가 4센티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나무토막은 8센티 정도는 됐다. 결국 네 면을 돌려가며 잘라야 했는데, 반듯이 자르기 몹시 어려웠다.
정확히 얘기하면 반듯이 자르지 못했다. 탁자 다리가 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제는 완전한 토막이 된 나무는 다시 책방 한 구석에서 잊혀갔다. 이번에는 그 시간이 조금 더 길었다.
2020년 4월.
두 번째 공간 작업을 시작하며 가가책방을 만들면서 쓰고 남은 목재들을 현장으로 옮겼다.
오래 쓸모를 찾던 나무토막들도 함께다.
그리고 여러 군데에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했다.
나무를 받치고, 높이를 맞추며 다양한 활약을 했다.
그리고 거의, 반영구적인 쓸모를 찾을 수도 있었다.
벤치를 만드는 데 다리가 필요해진 거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벤치 높이는 40센티가 넘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들어보니 낮은 게 낮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서 굳이 높이에 맞춰 새로 나무를 잘랐다. 벤치 높이를 36.5로 만들고 싶은 개인의 욕망도 작용했다.
다른 글에서 적었듯이 처음 벤치를 만들고 나서는 상판을 고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누가 앉았다 사고가 날까 염려되어 앉기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왼쪽 편에 나무토막 세 개를 나란히 얹어두었다.
잠깐 동안 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버린 줄 알고 누가 가져가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결론 내렸다.
버렸다고 하기엔 너무 말끔하고, 길이도 같았으며, 의도적으로 올려둔 게 명확해 보였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버리는 나무라고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판단한 거다.
결과만 두고 보면 그 판단은 돌이킬 수 없는 오판이었다.
한 순간의 판단 착오가 어떤 나무토막에게는 영원히 쓸모를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어버린 거다.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누군가, 굳이 가져갔다면, 자기 나름의 쓸모를 떠올렸을 거라고.
불태워질 뻔했던 한옥 신축 현장의 폐목재, 가가책방의 어느 책장 기둥, 독특한 테이블의 다리,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벤치의 다리.
혹은 그 어떤 쓸모의 가능성.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나무토막들은 어떤 쓸모 혹은 쓸모의 가능성을 얻었을까.
부디 좋은 데에, 멋지게 쓰였으면 좋겠다.
구해오고, 대패질하며 다듬고, 쓸모를 생각해 자르고, 쓰기 위해 옮긴 수고와 그동안 완전하지 못했지만 요긴했던 활약을 기억하며.
가가책방의 추억과 기억의 한 페이지에 담아둔다.
안녕, 나의 나무토막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