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아이와 우리의 그림자
아이를 생각하면 아직 불을 다루지 못하는 옛날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세상에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안다고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뭔가를 안다거나 확신하기보다 덜 놀라기 위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날것을 먹다 탈이나 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흔했을 테고 우연히 하늘에서 내려온 빛에 익은 고기를 맛보았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렸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더 안전한 고기. 삶은 그 고기를 맛보기 전과 후로 나뉘어 버렸다. 불을 스스로 일으킬 수 없고 지켜내지 못하는 동안에는 하늘에 사는 미지의 존재, 이제는 우리가 '신'이라 통칭하는 불가사의를 향해 기도인 줄도 모르고 바라고 또 원하는 날을 보냈을 것이다.
불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옛날 사람들의 삶은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달라진다. 더 매끄럽고 단단하며 다양한 그릇을 쓸 수 있고, 더 긴 시간 보관할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었으며, 추위와 맹수로부터 자신과 가족과 부족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 삶은 조금 더 안정되었고 이동보다 정착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자연스럽게 무리의 규모도 커졌다. 어두워 들어가지 못했던 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되고, 같은 이유로 움직일 수 없던 시간에도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옛날 사람에게 불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처음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의 우리는 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옛날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이 몸 안에서 하루하루 커가고 있음과 그 존재가 세상에 태어날 예정일 뿐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적지 않았는데 그 목록과 지식의 대부분은 아이가 세상에 나온 후에야 채우기 시작했다. 열 달 동안 아이가 세상에 나올 준비를 모두 마칠 동안 우리는 마음의 준비조차 다 끝내지 못했던 것이다. 불을 어떻게 피우는지, 무엇이 타고 안 타는지, 어떤 위험이 있는지 전혀 몰랐던 것처럼 아이를 어떻게 들어 올리는지 안는지, 어떻게 먹이고 언제 먹이며 먹인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가 어떤 기분인지 어떻게 알아차리는지 하나하나 배우기 벅찼다. 100일, 반년, 돌이 지나도 아이는 늘 미지의 존재로 남아있어서 익숙해지고 배우는 만큼 낯선 것과 알아야 하는 것이 늘어났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이의 존재가 우리에게 빛과 같다는 거다. 아이는 우리의 빛이자 그림자가 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불을 붙여서 생명과 보금자리를 지켰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어둠을 밝혀 아늑하게 했다. 세상이 온통 어두운 날에도 빛을 밝혀 어둠이 주는 두려움을 털어냈다. 같은 동굴도 불이 있고 빛이 나면 다른 공간이 됐다. 우리가 사는 같은 공간에 아이가 들어오면서 극적으로 변하듯이 그렇게 말이다.
어제는 아이와 저녁까지 밖에 있다가 들어왔다. 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고 책방에 가서 고양이 밥도 챙겨줬다. 5년 전 책방을 처음 열 때부터 오던 길냥이들이 지금도 온다. 아이도 더 어릴 때부터 봐 온 고양이를 알아본다. 책방에 들를 때면 밥그릇이 채워져 있거나 비었거나 자기도 사료를 주겠다고 통을 들고 나선다. 너무 정이 넘쳐서 밥그릇이 넘치도록 부어주며 즐거워한다. 그냥 밥만 주면 심심하니 같이 놀겠다고 따라 걷다가 슬금슬금 피하는 고양이들에게 와락 달려든다. 그러면 고양이들은 후다닥 달려 차 밑으로 숨어버리는데 가끔 아이는 차 아래까지 따라 들어가기도 한다.
"야옹아, 야옹 울어봐."
아이는 실제로 야옹아 야옹해 봐를 실천한다. 나는 밥을 먹을 때는 고양이들을 귀찮게 하지 말자고 자꾸 말리지만 아이는 말을 듣지 않는다. 자기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고양이를 보며 자기가 이젠 더 크다고 형인 줄 안다. 피해 다니는 고양이를 쫓아가며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즐거워한다. 길 고양이의 평균 수명이 2년 반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고 캣맘과 주변 주민들과의 갈등이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참견에 걱정한 적도 있지만 다행히 이 마을 사람들은 고양이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아이에게 관대한 것처럼 중성화 수술을 견디고 자기 자리에 머무는 고양이들을 마을이 돌보는 느낌을 받는다.
이번 기회에 아이에게 눈에 고양이가 보이지 않을 때 고양이를 부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책방 문에 달아둔 종을 딸랑딸랑 울리는 거다. 종이 울리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어디선가 고양이들이 달려온다. 아침이거나 저녁이거나 불 밝힌 책방을 향해 살랑살랑거리며 다가온다. 부르면 달려오는 아이의 모습처럼 그 풍경도 오래 계속 보고 싶은 풍경 중 하나다. 아이와 함께 고양이가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저녁이다.
불 없이 어두운 세상에서도 사람은 살았고 살아남았다. 불빛이 더 많고 더 밝아야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에게 불이 밝히는 빛은 마음과 몸, 생활을 아우르는 삶을 더 풍요롭고 아늑하게 해 준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삶에 아이가 없었더라도 불행하기만 한 삶은 아니었지만 아이가 주는 온기와 밝음을 모르는 삶이 더 나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처음 불을 쓰며 꺼뜨리거나 데듯 처음 아이를 키우며 많은 실수를 하고 상처를 얻기도 한다. 아무리 익숙해도 여전히 위험함을 품은 불처럼 육아가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어려움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 어려움들은 서로를 잘 모르는 날들에 가장 컸다가 서로를 알아가면서 조금 더 수월하게 풀린다. 예측을 벗어난 재난들이 지옥불처럼 우리를 불사를지라도 그 불을 피해 도망치거나 완전히 꺼뜨려 차갑게 식히는 길이 아니라 조금 더 현명하게 다루는 법을 배우자고 마음먹기 위해 늘 애쓰고 있다. 이런 애쓰는 마음, 고생이 무색할 만큼 혹독한 날도 있지만 그런 날도 틀림없이 지나간다고 믿고 있다.
불과 빛과 어두움과 그림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물들이며 하루하루 시간을 태운 재로 가족이라는 이름과 풍경을 그려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