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 불능
감은 직업이 여러 개인 사람이 됐다. N 잡러. 자신이 인터넷과 뉴스에서나 보던 사람이 됐음을 알게 된 건 독서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였다. 감이 자신은 이런 공간을 운영하고, 아르바이트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프리랜서로 편집 작업을 한다고 했더니 누군가 'N 잡러 시네요' 하는 거였다. 좋게 얘기하면 다양한 영역에 재능을 가진 사람이지만 나쁘게 보려고 하면 안정적인 직장이 없는 사람. 감에게 N잡러라는 용어를 그 정도 의미로 정의했다. 듣고 보니 자신은 N잡러가 맞았다. 어쩌다 보니, 못할 게 뭐 있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다 보니, N잡러가 되어 있던 것이다. 안 해본 건 있어도 또 못할 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시대의 인재였다.
문득 감은 오래전, 20년쯤 전에 유행하던 용어가 떠올랐다. '뉴프론티어 정신'이라는 용어였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를 이 용어의 의미는 두려움 없이 도전하며 새로운 영역을 열어가는 개척정신을 갖자는 거였다. 공익 광고 같은 영상 속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등장하는데 의미를 모르던 그때도 뭔가 앞서가는 느낌, 그런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는 동경을 품게 하는 웅장한 느낌을 줬다. 하지만 감은 이내 자신은 도저히 뉴프론티어가 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어린 감의 집에는 최신 컴퓨터도 없었으며, 유행 같은 건 한 해나 두 해쯤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되는 지역에 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들 앞에 서면 부끄러움에 말부터 더듬는 성격과 모험보다 안정을 추구하는 기질을 극복할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극복할 이유조차 찾을 수 없었다. 감은 유행에 뒤처져도, 더디거나 느려도, 상을 못 받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뭘 두고 다투는 경쟁자체가 싫을 때도 많았다. 나중에야 경쟁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패배할 게 뻔한 경쟁에 뛰어들어 힘을 빼는 게 싫은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자신이 평화주의자라 그렇다고 구실을 찾아다 댔다.
1등이나 2등보다는 10등이나 20등에 머무는 게 편했다. 1등 하는 친구를 동등한 경쟁 상대로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문제를 잘 풀고, 아는 게 많고, 공부를 잘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세계의 존재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수업을 잘 듣는 1등 하는 친구나 수업은 안 듣고 자기 공부를 하던 2등 하는 친구나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3등 하는 친구도 5등 하는 친구도, 심지어 감의 뒤에 있는 친구도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한다고 했다. 뭘 하느냐고 물어보면 다음 학년 수업까지 진도를 나갔다며 으스대기 일쑤였다. 짧게는 반년, 길게는 3년을 선행하고 있다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 같지 않았다. 도대체 이 녀석들은 뭘 배우고 있는 건가. 학교는 왜 다니고 있는 건가. 시험 기간에 시험공부를 그렇게 해야 했던 이유가 공부하는 과정을 지나쳐버렸기 때문이었단 말인가. 그걸 못 따라와서 학원도 다니고 과외도 하면서 자신보다 등수가 뒤에 머물게 됐단 말인가. 감은 이때부터 선행이라는 말이 두려워졌다. 괜히 어설프게 앞서가려고 하면 오히려 뒤처지고 만다는 자기 뒤에 있는 친구들의 사례가 그 근거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때까지 앞서 가지 않고, 앞장서지 않았던 자신의 선택이 처음으로 옳았다고 확신했다. 좋은 확신이었든 나쁜 확신이었든 감은 그렇게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교에 가고 지금에 이르렀다.
감이 신호등 앞에서 세 번째나 네 번째에 서야 마음 편해하는 이유도 같은 심리였다. 신호에 맞춰서 출발했다가 신호를 위반한 차와 크게 부딪히는 사고를 목격하고 며칠은 첫 번째나 두 번째 서면 큰 일을 당하고 말 거라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여러 모로 앞서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이 뉴스에서나 보던 N 잡러가 됐음을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이상한 사람이었다.
"변한 건가."
감은 오랜만에 소리 내어 혼잣말을 해봤다. 그래야 실감이 날 것 같고, 그래야 대답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였다. 시간이 그랬는지, 생활이 그랬는지, 사는 땅이 그렇게 했는지 어느 하나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자신은 변했다는 걸 받아들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겁이 나고 어색하던 자신은 어느샌가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생각하고 있는 걸 정보라도 되는 것처럼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최신 컴퓨터도 없고, 유행 같은 걸 따라가려고 하지 않으며, 휴대전화도 최신 기종을 쫓아가지 않지만 뒤처져 있지 않다고 느꼈다. 감은 선행 불능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금 느린 편, 무딘 편이었고 앞서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는 걸 좋아했음을 떠올렸다. 왜 중요한 건 늘 오래 잊고 지내게 되는가. 조금 더 기다릴 일이다.
2025. 07.23. 13:05-1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