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든 마음은 녹스는가
철이 든 모든 것은 녹슬기 마련이다. 매일 쓰던 연장조차 하루나 이틀쯤 습기 많은 곳에 두면 녹이 묻어난다. 감은 할머니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녹슬어 사라지는 철을 생각했다. 비와 바람과 햇살. 때로는 고마운 존재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감당하기 버거운 시련이 되곤 하는 환경들. 할머니는 세월과 사람의 틈에서 서서히 녹슬어 갔던 게 아닐까. 부지런했던 만큼 더 빨리 닳아버렸는지 모를 할머니의 삶이 사라진 후에야 생생해졌다. 어머니라거나 아버지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 감은 삐끄덕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목에서 나는 건지 마음에서 울리는 건지 한참을 닫아두고 버려두었다가 오랜만에 여는 지하실 문 소리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 관에는 못이 박혀있을까. 땅 속 깊은 곳에서 그 못은 녹이 슬게 될까. 못이 없는 게 나을 텐데.
유품은 순식간에 정리가 됐다. 옷이며 이불가지는 태웠고, 재산은 마찰 없이 나누어 가졌다. 누가 더 많이 갖고 덜 갖는다고 다투거나 마음 상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단출한 마지막이었다. 소란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있었다. 집에서 사람이 죽는 일이 드문 시대였으므로 경찰에 신고를 하고 검찰에서 다녀가고 사인을 밝히고 시신을 인도받는데 거의 하루가 걸렸다. 부모님과 할머니의 자식들, 삼촌, 고모들은 빈 관을 두고 절을 올렸다. 처음 발견한 사람, 감은 드물게 만나는 바람에 얼굴조차 거의 잊어버린 친척들의 질문에 같은 대답을 여러 번 반복했다. 오는 사람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영정을 마주하고 왔으면서, 어떻게 된 건지 다 들었으면서, 이제는 궁금한 것도 없으면서 왜 자꾸 와서 묻는지 알 수 없었다. 괴롭히려는 건가. 감은 첫날밤 이미 몹시 괴로웠다.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네. 감을 만나고 돌아서는 친척들이 뒤에서 수근거렸다. 의사의 검시서에 원인 불명이라고 적힌 사인 때문에 검사들의 조사가 끝나기까지 장례 절차를 진행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왔을 거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돌아가셨는데 사인에는 자연사가 없다고 했다. 가장 오래 조사를 받은 건 당연히 감이었다. 검사는 전날 별다른 이상은 없었는지, 할머니와의 관계는 원만했는지, 다투거나 마음 상하는 일은 없었는지를 물었다. 마치 '혹시 너야?'라고 묻는 것처럼 들렸다. 감은 울 수가 없었다. 검사의 질문 속 숨은 의도처럼 자신에게 할머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느낌이기보다 확신이었다. 학교를 가야 할 시간에 늦게까지 자거나 들어와야 할 시간에 들어오지 않을 때마다 할머니의 속은 녹슬어갔을 것이다. 매일 어루만지고 손길을 주어야 했을 관계는 삐걱거렸을 것이다. 불편한 마음에 불퉁하게 소리 질렀고, 일부러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날도 여러 날이었다. 이렇게 혼자 남을 줄 알았다면, 미리 알았다면 달랐을까.
조사가 끝나고 혐의 없음이라는 결론이 나온 후에야 할머니의 시신은 자리를 찾아갔다. 장례는 길었고, 긴 장례 동안 마지막까지 감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마치 모든 수분이 몸속 어딘가로 스며들어버린 것 같았다. 엄마를 어머니로 아빠를 아버지로 부르기게 한 마음은 분명 녹슨 마음이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감은 할머니를 떠올렸다. 견고하고 거대한 녹으로 된 산. 산만큼이나 크고 무거운 문이었다. 문은 엄마와 아빠에게 가는 길을 막고 세워져 있었다. 다른 이름이 아니면 닿지 않을 만큼, 어색함을 견디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속죄이며 애도인 것만 같았다. 할머니를 죽게 한 죄인. 누구도 단죄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에게 하루하루 책임을 물었다. 감은 이제 아주 어른처럼 철이 들어버렸다. 여전히 부모님은 말이 없었고, 감은 더 드물게 고향에 갔다. 어쩌면 자신의 무소식이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에 녹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가도 자신이 견디는 중인 생활고가 도리어 짐이 될까 봐 소리 내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래요. 감은 드물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가끔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잘 지내냐'라고 물어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니까요'하며 바빠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감은 말을 아꼈다. 할머니 관에 못이 박혀있다면 벌써 녹슬기 시작했을 것이다. 철든 것들은 녹이 슬기 마련이다. 녹슬어 구멍이 뚫리기 전까지 철든 마음은 들키지 않는 법이었다. 철든 문에 구멍이 뚫릴 무렵엔 이미 다 늦은 뒤였다. 철든 문은 녹슬어 굳게 닫혔다. 어머니. 멀리 어딘가에서 녹슨 메아리가 울렸다.
2025. 07. 25. 13:46-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