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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출구

독립 혹은 홀로서기

by 가가책방

감은 일찍 철들어야 했다. 진로와 진학 결정도 거의 혼자 해냈다. 부모님은 말이 없었다. 학교에서 부모님 도장을 받아오라는 확인서를 보여줘도 도장만 건네주었다. 결정이 필요할 때도 중학교 이후로는 '알아서 잘하겠지'했다. 고등학교부터는 물어도 언제나처럼 '알아서 잘하겠지'하고 믿는다는 말만 돌아올 것이므로 조용히 도장을 꺼내서 찍어갔다. 감은 부모와 함께 있으면서도 독립한 듯 느꼈다. 스스로 결정하고, 결정에 책임을 지는데 익숙해졌다. 가끔 마주치는 동네 어른들이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어른스럽다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몇 번쯤 부모님을 도와준 일 때문인지, 일찍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부모님 일터에 들러 함께 일하다 돌아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철들었다고 했다.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감은 점점 더 부모님에게 자기 얘기를 하지 않게 됐다. 어른은 그래야 할 것 같았고, 철든 사람이라면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게 당연하기에.

몇 년 후 몇 개월인가 연락이 없자 드물게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대학에 진학하고 적응하지 못해서 두 번쯤 휴학을 했다 복학하기를 반복하던 즈음이다. 어머니는 학교는 어떠냐고 물었다. 마치 고등학생에게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듯했다. 감은 드물게 거짓말을 했다. 잘 지낸다고, 괜찮다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전에 지내던 집보다 더 살기 좋다고 했다.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얘기 말고는 다 거짓말이었다. 철 없이 칭얼거릴 수 없었다. 어른이라면 이 정도는 알아서 잘 해내야 하고, 쉽지 않아도 견딜 수 있어야 하니까. 어머니는 '그러냐'는 말 뿐이었다. 전화를 끊기 전 '아버지한테 전화 한 번 드려라'하며 궁금해한다고 하셨다. 감은 '네'하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쯤 전화벨이 울리고 아버지가 "어."하고 한 호흡을 뱉고 나서 '웬일이냐'했다. 감은 있는 그대로 어머니와 통화를 했는데 아버지가 궁금해하신다고 하셔서 그렇다고 했다. 나중에야 이런 곧이곧대로인 말이 융통성이 없는 표현이라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서운해하거나 아니거나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게 어른다움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아마도 거의 처음으로 "자식 하나가 없는 줄 알았다"라고 했다. 연락도 말도 없는 아이가 서운하다는 말 대신이었을 것이다. 감은 나오는 대로 '죄송해요, 자주 연락할게요'했다. 너무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나와서 스스로 듣기에도 별로 죄송하지 않은 것 같아 죄송해요란 말 뒤에 자주 연락할게요란 말이 따라 나왔다.

이때까지도 감은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등록금은 당연히 부모님이 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부터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다른 어려움에는 말을 아껴도 경제적인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기꺼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은행에 다녀왔다. 휴대전화에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다시 전화가 걸려올 때면 얼마가 입금 됐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뒤였다. 아버지는 그게 부모의 책임이라도 되는 듯 어려우면 또 전화하라고 하셨다. 감은 고마우면서도 왠지 남 같다고 생각했다. 일이 있어야 전화를 거는 자신과 일이 생기면 전화하라는 아버지의 말 모두 그랬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감은 엄마, 아빠 대신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의외로 기억은 금세 선명해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였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감과 함께 살았다. 감의 부모님 말을 빌리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맞아떨어져서였다. 할머니의 사정과 감의 사정이 맞아떨어져서. 구구절절 이유가 늘어지지 않는, 어른의 사정이었다. 할머니 역시 말이 많지 않았다. 가풍인 모양이었다. 필요한 말만 하고, 캐묻거나 파고들지 않았다. 감이 학교에 가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너무 늦게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않아도 '왔냐'가 다였다. 얼굴 가득 걱정을 묻히고 있어서 밤새 잠도 못 주무셨다는 걸 알만한데도 서로 별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잘 지냈다. 어른답게, 어른스럽게 서로를 책임지면서. 그런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건 말 그대로 갑자기였다. 어느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나갔다 오곤 하던 할머니는 감이 배고픔에 눈 뜰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한 마지막이었다.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감은 장례식 내내 울지 않았다. 슬픈 기분이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해진다는 말도 다 거짓말이었다. 가슴은 굳어버린 것처럼 딱딱해져서 먹먹하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다만 침을 삼킬 때마다 목 언저리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따가웠을 뿐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서로의 자리로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건 전화에서 처음으로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혼자가 됐으므로, 더 단단하고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엄마를 어머니라고 하고 아빠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한 거였다.

사십구재를 지내고 올라오는 버스에서 감은 혼자와 독립을 나란히 두고 오래 생각했다. 혼자가 되는 게 독립인 걸까. 독립한 사람은 모두 혼자인 걸까.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에, 원하지 않은 날에 찾아오는 혼자 역시 독립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자질구레한 가사노동, 인정받지 못하던 큰 빈자리를 지난 사십팔일 간 홀로 감당한 뒤였다. '혼자가 되는 건 독립이 아니야.' 적어도 그가 아는 한 혼자와 독립은 나란히 서있지 않았다.


2025. 07. 24. 13:05-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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