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앞에 서서
감이 작은 도시로 옮겨 살게 되면서 겪은 가장 큰 변화는 운전을 시작한 일이었다. 큰 도시에 살 때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자기 차에 많은 돈과 열정을 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작은 도시로 옮긴 첫 해까지도 그랬다. 조금 더디고 번거롭긴 하지만 그럭저럭 참을만한 불편이었고 느림이었다. 큰 도시에서 작은 도시로 사는 곳을 바꾸는 결심보다 한 없이 사소하고 드물게 겪는 일. 생선에서 가시를 발라내는 것과 같았다. 부드러운 살을 먹기 위해 감내하는 약간의 수고로움은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춘 변화를 실감하는데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느꼈다. 반년 가까운 시간을 그저 쉬며 보내고 이제 일을 좀 시작해 볼까 하는 궁리를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거의 모든 일터가 도심에서 3킬로미터나 5킬로미터 정도 벗어나 있었다. 걷기엔 너무 멀고, 자전거나 스쿠터를 타기도 애매하며 대중교통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출근과 퇴근을 몇 달 쉬었더니 출근과 퇴근이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도시에서 운전하지 않음은 불편을 감수함이 아닌 불편함 그 자체였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금세 바뀐다는 걸 모르지 않았음에도 자신마저 별로 다르지 않았음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목적이나 시간을 정하지 않고 걷거나 달리러 나가는 일, 한가롭게 누비는 산책, 약속이 없는 만남들이 새삼 소중해졌다. 감은 차를 샀다.
운전을 시작하면서 감은 자기가 이렇게 예민하고 감정적인 사람인 줄 다시 알았다. 시간과 함께 무뎌지고 무던해진 줄 알았던 성미는 속도계가 올라가는 속도보다 빠르게 되살아났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운전자들을 잠재적 사고 유발자라고 생각했다. 시동을 걸 때부터 경계를 서는 군인처럼 각 잡힌 자세를 유지했다. 사방이 유도 미사일이었다. 자기 차선을 뻔히 보고도 깜빡이 없이 들어오는 차들을 향해 반격하듯 경적을 울리다 먼저 지쳐버렸다. 방탄 자동차처럼 긴 경적에도 상대는 무심했다. 발끈할 법도 한데 아주 태연했다. 못 들은 것처럼, 자신만 그 상황을 본 것처럼, 나만 유별난 것처럼. 도로는 그랬다. 분노의 도로. 저마다의 분노를 싣고 다니다 운이 좋으면 비켜가고 운이 나쁘면 맞부딪히는 전쟁터. 영리하고 똑똑하게, 때로는 뻔뻔하게 들이밀지 않으면 한 없이 양보나 당해야 하는 순발력의 세계. 감은 첫 주부터 자신이 없어졌다. 차라리 더디고 불편한 게 나았다.
감에게 가장 편안한 신호등 색깔은 빨강이었다. 신호등 앞에 설 때면 첫 번째나 두 번째보다 세 번째나 네 번째 혹은 그 뒤에 서려고 했다. 늘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어도 거울을 부지런히 보며 속도를 줄이거나 유지하다 보면 꼭 세 번째나 네 번째에 설 때가 많았다. 신호가 바뀐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사 거리라면 네 번째로 돌아올 신호까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운전할 때는 바꾸기 힘든 음악의 목록을 바꾸거나 그 사이에 도착한 메시지도 천천히 확인할 수 있었다. 몇 번인가 첫 번째나 두 번째에 서 있다가 깜빡하고 뒤차의 경적에 놀라 출발한 뒤로는 꾸준히 세 번째 혹은 네 번째를 추구했다. 별 것 아닌 목표, 신호등 앞에서 세 번째나 네 번째에 서기가 운전의 숨을 틔워주었다. 제법 운전이 할만했다. 운전을 잘하는 기분이었다.
운전을 시작하면서 감에게 한 가지 좋고 나쁨이 더 생겼다. 목적지 없는 곳으로 향하는 운전에 대해서였다. 감은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을 때 운전하기 싫어지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정확히 어디가 아닌 어디 근처의 어딘가로 가는 일정이 있을 때마다 힘들어했다. 그 어디쯤의 지리에 익숙해져서 주차를 어디쯤에 하면 된다는 가늠이 생긴 다음엔 또 달랐다. 목적지가 없는 운전이라고 해도 주차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는 괜찮았다. 빙 돌아서 둘러보고 오거나 잠깐 길 가에 차를 세우는 경우도 괜찮았다. 감은 이런 자기의 심리가 무슨 의미인지 오래 고민했다. 마침내 가능성 높은 대답을 떠올렸을 때 의심스럽긴 해도 그렇구나 하고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여러 번 생각했다. 감은 불확실한 게 싫었던 것이다. 단순히 불확실하기만 한 게 아니라 동행이 있는 경우의 불확실함을 앞두고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해했다. 대중교통으로 다닌다면 얼마든지 헤매도 괜찮지만 그것도 혼자일 때 얘기였다.
감은 큰 도시에서 작은 도시로 옮겨 사는 자기 마음을 돌아봤다. 큰 도시 속에 있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신이 보였다. 빠르고 편리한 교통, 환하고 반짝이는 밤들, 너무 많은 사람들, 구분하기 힘든 음식과 얼굴들. 신호등의 초록불을 보고 달려가는 자동차들처럼 저마다 자신이 가려는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도로 풍경 같았다. 부딪히고 상처 주는 일이 그토록 흔한 게 당연해 보였다. 빨강 신호등 앞에서 감은 벌써 아득한 옛날 같은 시간을 떠올렸다. 꿈인가. 뒤에서 빵 하는 경적이 들렸다. 비상등을 켠다. 초록불이 켜졌고 앞차는 저만큼 앞서 가고 있다. 출발이다.
2025. 07. 22. 14:00 - 1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