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 나무꾼과 마음
가까워지려 할수록 멀어지는 게 있다. 감에게는 소설이 그랬다. 상상 속 인물이고 꾸며낸 이야기인데도 편하게 풀어낼 수가 없었다. 처음, 한 줄을 쓰는 게 힘들었다.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적어야지 마음먹어봐도 머릿속으로 고쳐보다 놓쳐버리는 게 일상이었다. 소설을 읽는 걸로 만족하고 지내보니 참 자기에게 걸맞은 결말이지 싶어졌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소설을 쓰려고 했던가.
사실 방법이 잘못되었을 뿐 뭔가와 가까워지려는 마음이나 원하는 마음이 잘못된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음이 이렇게 생겨먹었는데 다른 걸 내놓기 위해 스스로의 마음부터 속이는 게 내키지 않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혹시 생길지 모를 독자를 기만하는 일을 걱정했다. 애초에 글러먹은 마음이었다. 무슨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된다고 미래를 염려하기까지 한단 말인가. 감은 스스로가 우스우면서도 그게 자기답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였다.
습관처럼 글을 쓰려고 앉은 밤에도 생각만 어지럽고 손이 나아가지 않았다. 결국 자려고 누웠을 때 감은 『오즈의 마법사』 속 양철 나무꾼이 떠올렸다. 심장이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서 마음이 없다고 믿는 양철 나무꾼. 여행의 마지막에 양철 나무꾼이 심장을 얻었던가.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서 의심스럽지만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얻지는 못했던 듯하다. 교묘한 말장난에 속아 넘어간 모양새를 보고 삐딱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저건 사기지. 행복하고 만족하면 그만일까. 양철 나무꾼의 마음을 증명해 줄 존재들이 없는 날이 온다면, 텅 빈 마음은 삶을 지탱해 줄 수 있을까. 그날이 왔을 때 양철 나무꾼이 삐딱해진다 해도 그럴 만도 하다 할 거였다. 삐딱한 게 뭐 어떻단 말인가. 소설을 재밌게 쓰지 못할 뿐, 회의주의는 인생에 도움이 된다. 적어도 흔히 당하는 사기에 휘말리는 일은 적을 테니까.
감이 양철 나무꾼을 떠올렸을 때 마치 소설 속 장면이 흐르듯 머릿속에 다음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걸 쓰기만 하면 제법 재밌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줄거리. 잠자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불을 켜고, 자리에 앉아서 한 줄을 쓰려는데 벌써 기억나지 않았다. 뭐였더라, 좋은 생각이 떠올랐었는데. 한참을 궁리한 끝에 얻은 건 이어지지 않는 단어 몇 개였다. 도저히 잠자리에서처럼 뻗어나가지 않고 꽉 막혀 버린 연상의 가지들. 꽃도 열매도 없이 잎만 무성해서 마당 한 구석을 그늘지게 하다가 가을에는 치워야 할 낙엽만 잔뜩 떨어뜨리는 사과나무 같았다. 잠자리 소설가로구만. 머릿속에서만 작가고 잠자리에서만 소설가야. 감은 자기의 어떤 잘못된 접근 방식이 소설 쓰기를 못하게 하는지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 경험 그 자체를 써서 세상에 내보이면서 소설이라고 말하는 작가들이 위대해 보였다. 실패한 결혼이나 연애, 불우한 어린 시절, 만남부터 절교까지 엉망이었던 친구.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등장하는 인물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무해한 실화. 감은 그런 무해함이 어떻게 실현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기에게 온 감정을 집중할 뿐 다른 사람의 의도나 마음 같은 건 서술하지 않는 태도. 이런 일이 있었고, 그게 나에게 어떤 느낌이었으며, 이후로 무슨 생각을 하고, 왜 지금의 태도를 선택했는지 막힘없는 자기 고백을 이어가는 그 인물은 실제 작가와 동일 인물인 걸까. 이기적이면서 객관적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자기 이야기면서 자기 마음이지만 소설로 써버린 이상 등장인물 '나'의 이야기로 떨어져 나가서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않게 된다는 상상은 어떻게 현실이 되는 걸까. 그게 가능할 때 소설 쓰기를 시작해야 하고,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만 작가가 되는 건 아닐까. 감은 한 번 더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어차피 자리에 앉아 있어도 질문만 이어질 뿐, 소설이 되는 건 아니었으므로. 차라리 잠자리 소설가로 잠들기 전까지 활약하는 게 나았다.
감은 어떻게든 풀어내야 한다. 무엇이든 써내려 가야 한다. 할머니가 없는 세상이어도, 부모님을 떠나 지내는 일이 길어져도, 자신만 잃지 않는다면 언제든 기회와 만날 것이므로 그날까지 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누구든 죽음을 향해 걸어갈 수는 있어도 죽음에서 스스로 걸어 나올 수는 없으므로, 죽음은 출구가 될 수 없었다. 살아야 한다.
2025. 07. 26. 23:14-2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