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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May 17. 2019

VENEZUELA ORINOCO RIVER에서

저녁 해가 황혼을 만들어 가고 있다.-Skyraider-


주님께서 당신에게 복을 주시고 당신을 지켜 주시며                        2013.01.05

당신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님께서 당신을 고이 보시어서 당신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어느새 베네수엘라에 도착한 지 보름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본선은 여전히 하염없이 앵커링 중입니다. 

본선이 닻을 박고 있는 곳은 ORINOCO RIVER의 INNER ANCHORAGE인데 세로 1마일, 가로 2.5마일 정도 되는 직사각형 공간에 9척의 배들이 짧게는 3 케이블, 길게는 5 케이블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서 게으른 항만과 대리점 험담으로 하루하루 보내는 실정이죠. 


 본선 식구들도 영국 출항해서 이곳까지 오면서 당한 악천후는 이미 잊은 지 오래고, 간만에 맞이한 여유로운 시간들을 즐기고(?) 있는 형국입니다. 


 지난번 잠시 투묘 대기했던 바닷 쪽과는 반대로 이곳은 SWELL도 없고, 바람도 세게 불 때가 10노트 정도인 평온한 곳이라 그야말로 조용하게 지내기는 안심맞춤(안성맞춤 대신 써 봅니다)인 곳입니다.


 다만, 애초 이곳으로 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지난번처럼 미국으로 향할 것을 예측하고 있던 터라 

BONDED STORE에 맥주와 담배를 싣지 못한 탓으로 술도 떨어지고 담배도 떨어져서 - 애주가와 애연가들에게는 그야말로 대재앙이죠 - 이렇듯이 우울함도 엇갈리는 시간을 보내는 중입니다. 


  CK ANGIE에 승선하고서는 거의 술을 끊고 산 탓에 술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제게는 그다지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아닙니다만 평소 같으면 북적일 주말 밤인 지금도 다들 방에서 지난번 승선한 이들이 가져온 새로운 비디오 프로그램이나 보면서 조용하게 지내는 중이죠. 아 물론, 레크리에이션룸에서 마작을 즐기고 있는 영감님들도 계시기는 하지만요. ^^


  장기 투묘를 예상하고 애초에 조수기를 빵빵하게 돌려 청수 탱크는 OVERFLOW 될 지경으로 채워둔 덕분에, -본선의 청수 소모량은 하루 5톤 정도밖에 안된답니다. ^^ - 두 달 넘는 기간 동안 절수 없이 사용할 수 있고 GARBAGE도 지난번 영국에서 죄다 양륙 해버린 관계로 아직 여유만만이지만 이제 보름 정도밖에 버틸 수 없는 부식이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텅텅 비어버린 본드 스토어도 마찬가지고요. 


 워낙 이곳에 대기하고 있는 배들이 많고 우리처럼 예기치 않던 장기 투묘로 접어든 배들 역시 셈하기 어려운 관계로 VHF를 통해 우리와 비슷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배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네요... 수요가 이렇게 밀리다 보니 부식업자들은 완전 '배짱 장사'라 할 만큼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형국입니다. 말보로 한 보루에 35불...-_-;; 이건 담배값이 비싼 유럽에서도 만나기 힘든 놀라운 가격이죠.


 채소와 육류 역시 높은 가격대를 형성 중인 데다 한국 부식을 구할 길도 막막한지라 이래저래 사주부의 고민은 늘어만가는 중입니다. 


 저희 바로 앞에 투묘 중인 M/V CIHAN(무슨 배 이름이 이 모양인지.. 처음에 '치한'이라 읽었다죠)이 게 VHF로 우리 배를 부르더니 혹시 맥주나 담배 있으면 좀 팔라고 통사정을 하더라고요. 


  우리도 없지만 어떻게 사가려고? 했더니 RESCUE BOAT 내려서 우리 배로 달려올 용의가 있다나요? 하여간 필리핀 친구들, 우리만큼 놀기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것 정말 티 팍팍 내는 사람들입니다. ^^


 그래도, 부원들은 그저 즐거운 모양입니다. 바삐 지나건, 고생 고생하건, 우리처럼 한가하게 지나 건간에 흐르는  시간 따라 급여는 쌓이듯이 주머니로 들어오는 형국이니 말이죠. ^^ 


  저도 실로 오랜만에 밀린 서류업무 죄다 털고 여유만만하게 담당 기기 점검을 마쳐두고 - 어차피 영국에서 선급의 연차 검사를 받은 상황이라 그다지 볼 것도 없었지만요 - 하루하루 설렁설렁 지난 8개월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그동안 나흘 이상 접안한 일도, 역시 나흘 이상 앵커링 한 적도 없이 다이렉트 접/이안이 계속되더니 이번처럼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 


  예전 아젤리아 같이 탔던 김영O 일항사는 "재O이 완전 꿀 빨고 있네?"라는 메모를 보내왔다죠.


 ... 하여간 둘째는 이렇게 '꿀 빨면서' 연가를 앞둔 마지막 승선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


 처음 중국 리자오에서 출발해서 호주 그래드스톤, 멕시코 나자로 까르데나쓰, 파나마 운하를 넘어 콜롬비아의 산타마르타, 영국의 리버풀, 미국의 볼티모어,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다시 미국의 뉴올리언스, 영국의 이밍엄을 거쳐 이제 닻을 박고 있는 이곳 베네수엘라 PUERTO ORDAZ까지. 인도양과 태평양을 주로 오갔던 지난번 DAISY에서 보낸 시간의 반대급부인지 이번에는 대서양을 주로 떠돌다가 집에 돌아갈 듯싶네요. ^^


  서울의 추위 소식은 지구 반대편 이곳 베네수엘라까지 들려오고 있습니다. 모쪼록 빙판, 추위 조심하시고 우리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 그리고 화목을 멀리서 기원해봅니다. 다시 메일 할게요.


2013년 1월 5일,

VENEZUELA ORINOCO RIVER INNER ANCHORAGE에서,

둘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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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에게                                                    2013.01.05


  네 편지를 보니 아직도 연도가 바뀌어 2013년이 된 것을 깜빡! 잊고 있었구나. 달력을 모두 2013으로 바꾸면서 나는 왜 이리 세월의 흐름에 둔감하면서도 또 민감해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고 있다.

어쨌거나  괜스레 늙은 티 내는 이야기로 변질이 될까 봐 세월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에서 끝내기로 한다.


 <VENEZUELA ORINOCO RIVER INNER ANCHORAGE.>


지금 네가 닻을 내려주고 있는 곳이쟎니? 아마도 강하구에서 얼마 정도 강을 타고 들어가서 있는 외항선들이 PUERTO ORDAZ항 부두에 접안하기 전에 기다리고 있는 묘박지인 줄 이름만 봐도 알겠구나.


헌데 나는 배를 타기 전인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베네수엘라라는 나라 이름만 들어도 그냥 달콤한 향수 같은 느낌이 들며 아련한 감정부터 솟아오르곤 했었지.


그렇지만 그 나라를 흐르고 있는 오리노코강이란 이름에서는 그와는 또 다른 모험심에 불타는 젊음을 느끼고 있었단다. 밀림이 있고 힘차게 흐르는 강이 있어 그 안에 창과 활을 흔들어 쏘면서 짐승 사냥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원색의 원주민의 모습부터 떠 올리면서 말이지.


 그러나 지금은 어쩌다 그곳에 나타난 외인들의 침략으로 활기가 몽땅 시들어 버린 식민지의 비애 같은 그런 느낌부터 들고 있으니 나도 참...


 어쨌건 그건 다 내 마음이 일구어 낸 아마도 예전에 읽었던 책을 통한 나만의 느낌이 증폭되어 향수로 남아서 그리 된 것으로 여겨지는구나. 


그래서 잠깐 오리노코강에 대해 얼마나 한 정보가 있는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렇구나.


 기아나 고지에서 시작하여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가 2,061km의 남아메리카 북부를 흐르는 강으로, 


파리마 산맥(Parima山脈)과 ( 남아메리카 브라질과 베네수엘라의 경계에 있는 길이 320km의 산맥. 해발 고도가 1,500미터에 달한다.) 파카 라이마 산맥(Pacaraima山脈)의 (베네수엘라ㆍ브라질ㆍ가이아나에 걸쳐 있으며, 길이는 약 800km.) 두 산맥이 함께 오리노코 강 줄기와 아마존 강 줄기를 갈라놓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설명으론 아마존강과 대비되는 큰 강 같지만 사실 7,000 킬로미터로 추측되는 세계 제일의 아마존강과는 대비할 수 없는 강이라 생각되는구나.


 어쨌거나 너는 지금 그곳에 머무르고 있으니 그곳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일을 찾아서라도 멋진 경험을 해보도록 하거라. 그래서 남에게 이야깃거리라도 챙길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무조건 네 삶의 여정에서 보탬이 되는 일이 아니겠니? 세월은 그렇듯 켜켜이 쌓아져 흘러가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지금 네가 누리고 있는 시간은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3 대양을 넘나들던 항정을 조용히 거두어 주며 그냥 기다리는, -그것도 조용하고 잔잔한 강상에서- 무료할 정도로 정밀(靜謐)한 속에 편히 쉬고 있는 것이라 짐작되는구나.


 이런 시간이 뱃사람들에겐 알게 모르게 선상생활 중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거두어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다스릴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갖게 하여 다음에 다시 만날 바다에서의 생활을 준비시키는 중요한 휴식의 순간이 되는 것이란다.


 비록 곧 연가를 부여받아 하선할 예정이긴 하지만 집에서 쉬는 것도 체력이 같이 따라주어야 하는 일이쟎니? 모처럼의 휴식시간을 열심히 쉬지만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아서 스스로를 재충전하는 활기찬 기회로 충분히 활용해 주길 바란다. 


 연락이 된다면 김영O 일항사에게 안부 전해주거라. 그는 맡은 바 일을 열심히 또 묵묵히 수행했던 아빠의 멋진 동료요 부하였던 한 사람이었지.


 늘 건강하니 지내길 기원한다. 

집에서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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