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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을 넘나드는 통화

동시인데 시간이 다르고 간극은 너무나 멀리 떨어진 통화

by 전희태


JHT_6453.JPG 저 달과도 통화가 가능할 건데.


-OO 통신을 이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 모든 라인이 연결 중이오니 잠시 후에 다시 걸어 주십시오.

컴퓨터 응답의 안내 방송이, 새벽 세시에 일어나 조금이라도 싼 할인 요금이 적용되는 시간을 이용하여 집으로 전화를 걸어 보려고 통신실을 찾아와 서성거리고 있는, 내 귀에 울리고 있다.

안내원 음성이 말했던 잠시를 기다렸다가 다시 걸었건만 계속 반복되어 흘러나오는 건 똑같은 안내 방송이다.

한 시간 후인 네 시에 다시 걸어도 같은 음색의 비정한 기계음으로 반복되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괜스레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의심스러운 의혹이 생겨나며 조바심을 더욱 크게 늘어나게 한다.


내가 있는 인도양을 달리고 있는 배와 우리 집 간의 지금 벌어진 공간의 간격이 그만큼 멀기에, 볼 수 없는 상황은 이렇듯 상상과 걱정을 짬뽕처럼 섞어주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대장암 수술을 받은 지가 벌써 일 년여가 지나가면서, 사실은 며칠 전 통화 시 월요일인 어제쯤 종합검진 차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에 그 결과를 알아보고 싶어 걸려는 전화이다.


그렇게 걸리지 않는 전화가 마치 좋지 않은 소식이나 예고해주려고 그러는 듯싶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니 더욱 초조함에 속이 부글거린다.

+

글쎄 그럴는지가 약간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폭주하는 전화 회선 때문에 어딘가 감당 못하고 고장이라도 났을 상황을 이렇게 컴퓨터 자동 응답 장치로 고객들이 몰려드는 할인 시간대를 운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한 가닥 들어서니, 이번에는 OO통신이 너무한다 싶은 생각마저 든다.


네 시 반이 되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보려고 일어난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화의 다이얼을 돌리고 기다린다. 이번에는 예감이 좋아 연결되려는 기미를 느낄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은 내 마음속에 잠복하고 있던 의심의 암귀가 왕성한 활동을 한 때문으로 그 이유가 밝혀지려는 모양이다.


전화는 그대로 연결이 되었고 쓸데없이 만들어 가졌던 모든 걱정을 일시에 떨쳐낼 수 있게 아내의 밝고 맑은 목소리가

-여보세요? 응답하며 나타나더니 이어서.

-당신 감기 걸리신 거예요?

한술 더 떠 아내는 나의 응답 목소리에서 갑자기 감기 끼라도 찾아냈는지, 음성이 이상한데 어디가 아프냐고 다그치듯이 물어 온다.

-새벽부터 설쳤던 때문에 목소리가 조금 잠겨서 그런 거예요. 어디가 아프거나 감기에 붙잡힌 것은 아니라고 부인한다.


아울러 더 다른 이야기를 듣지 않았어도, 이미 아내의 건강 검진 결과에는 이상이 없다는 확신이 들어선다.

그렇긴 해도 꼭 확인하고픈 마음이 통화를 이어나간다.

-여보 당신 내시경 검사한 결과 어때요?

-아 예, 걱정 마세요. 아주 깨끗하답니다.

-그러네요. 아주 고마운 일이었군요.


한결 편해진 마음 되어 통화는 한동안 더 계속되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배의 시간은 새벽 4시 반인데, 전화를 받는 아내가 있는 우리 집의 시간은 아침 10시 반으로, 인도양과 한국이라는 공간까지 사이에 두면서, 단지 전파라는 한 가닥 연결 줄로 시공을 함께하며 서로를 확인하고 있음에 갑자기 경이로운 느낌이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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