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넘어서

아내에게 날아온 편지

by 전희태



209788.jpg 눈보라를 뚫고 나온 후의 갑판

KBS의 단파 방송 <파도를 넘어서>를 통해서 아내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육성으로 내 보낸다 하여 그걸 직접 들어 보려고 첩보원이 단파라디오로 암호 방송을 들어내려는 것보다도 더 조심스레 열심히 들었건만 전파가 잘 잡히지 않아 직접 듣지를 못했다.


우리나라와는 지구의 정반대 편에 있는 브라질의 PDM(Ponta Da Madeira)항에 입항해 있을 때였다. 

항해 중이었다면 오히려 잘 잡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가져봤지만, 어쨌건 방송으로는 듣지 못했어도 편지로는 받았기에 여기에 올려본다.


1970년, 백일을 맞이한 첫째를 안고있는 아내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가고 새 날이 밝아 왔습니다.

해마다 전보로 새해 인사를 늘 대신했는데, 올해는 방송을 통해서 그 전보를 대신하게 되니 조금은 쑥스럽고, 당신 잘 만난 덕택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여보, 지난해 우리 집에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죠.

좋은 일도 있었고 다시는 겪기 싫은 그런 일도 있었지요. 둘째 재성이가 당신의 후배로 해양대학에 입학한 것, 어머님께서 저희 집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사시게 된 것, 이런 일들만 한 해 동안 계속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첫째 우성이가 몸이 좋지 못해 항암제 치료와 입원을 반복할 때는 정말 우리 부부나 아니, 모든 집안 식구들이 근심과 걱정에 잠겨야 했죠. 


그 힘든 항암제 치료를 오히려 편안한 마음과 주님께 대한 의지로 무사히 끝내고 다시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우성이를 보면 정말 아직도 가슴이 뿌듯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제 마음도 제 마음이었지만 머나먼 바다에서 집안 걱정까지 하게 된 당신을 생각하며 그것을 참아 받았습니다.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늘 기도로써, 틈틈이 전화로써 가족들과 함께 하려 애쓴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늘 의연하고 강해지도록 저를 일깨워주신 당신께도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그와 더불어 늘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으로 우리를 강하게 해주신 주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우리 막내 규성이도 올해 대학시험을 치르게 되는군요.

늦게 얻은 막내아들이라 늘 아기 같을 줄 알았는데, 벌써 대학시험을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세월이 빠르다는 느낌만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제 우성이도 완쾌되어가고 재성이도 멀리 부산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있고, 규성이의 올해 일만 잘 끝나 준다면 우리 가족들에게도 어느 정도 여유가 찾아오겠죠. 좀처럼 내비치지 않았던 우리의 소망, 복잡하고 삭막한 서울을 떠나 조용하고 공기 좋은 시골에서 살고 싶던 그 소망도 이제 곧 이루어지리라 믿어요. 당신도 나와 같은 소망인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늘 웃음과 넉넉한 모습으로 우리 다섯 식구의 울타리가 되어 주셨던 당신께 올해는 정말 시련이 아닌 즐거움으로, 걱정이 아닌 기대로써 다가오길 다시 한 번 기도드려 봅니다.

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고, 항상 사랑 속에 살아갈 그런 한 해로 1997년이 다가왔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셋성이와 함께 당신을 기다리며... B.B


-1997년 1월 2일 KBS의 단파 “파도를 넘어서” 프로그램에서 방송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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