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추위에 강하다고 느끼는 건
에어컨디셔너를 냉방 작동은 안 시키고, 공기 순환만 하는데도 덥지가 않고 서늘한 느낌을 주는 게 계절이 세월 따라 제 면모를 찾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창가에 묶어놓은 화분에서 향기 좋은 꽃을 피우는 나무(FRANGIPANI WHITE)가, 먹고 남은 씨앗을 뱉어내 싹을 틔우게 된 레몬 나무를 제 발 밑에 두고 내려다보고 있다.
그간 호주를 몇 번 왕복하면서 듬뿍 받았던 햇볕으로 인해 얻어진 진초록 때깔의 잎새들을 뽐내려고 폼이라도 잡는 모습이다. 그 모양을 살펴보다가, 그대로 창가 그 자리에 놔두면 북태평양의 초겨울 추위가 다가 들 때, 잎이 시들어 낙엽이 될 것 같은 예감에 있던 자리를 옮겨 주기로 한다. 사무실 한쪽 편 소파가 있는 자리의 코너 쪽으로 옮겨주고 보니, 방안 온도가 갑자기 추워지지만 않는다면 이번 항차 내내 그 자리를 지키게 해도 되겠다.
주섬주섬 일을 끝마치고 선위(船位)를 확인하려고 브리지 해도 실에 올라간다. 배는 이미 북태평양의 언저리에 들어서서 캄차카 해류를 타고 제법 속력을 올리고 있으니 실내도 그만큼 서늘하게 식어가는 게 당연하다.
어느새 겨울이 저만큼 다가서기 시작한 북태평양을 오랜만에 찾아왔건만, 나는 그런 계절을 망각한 채 짧은 팔의 옷을 입고 올라간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긴 팔의 윗옷을 입고 있다. 점퍼까지 껴입고도 가슴을 펴지 않아, 추워 보이는 보슨( BOATSWAINS. 갑판장)을 향해 말을 건다.
-무슨 옷을 그렇게 껴입고 있는 거야?
놀리듯 물었는데 옆에 있던 일등항해사가
-보슨이 이렇게 입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우리 배에서 제일 추위를 타는 사람은 기관장 님일 겁니다.
-어제 보니 춥다고 옷을 두껍게 입고도 갤리(GALLEY)에 와서 불까지 쬐고 가시더라고요.
한다.
-그렇다면, 에어컨을 환기로 돌릴 게 아니라, 난방으로 돌려놓지 왜 그러고 있는 거지?
의문을 표하면서 화제를 바꾼다.
-우리 배에서 제일 추위를 타는 것은 내방 화분의 나무들이지. 했다.
-아까 창가에서 사무실 방으로 옮겨 주긴 했지만 방이 좀 썰렁한 것 같아.
좀전에 자리를 옮겨준 꽃나무를 떠올리며 에어컨디셔너를 얼른 난방으로 돌리도록 요청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데.
-우리 배에서 제일 더위를 타는 사람은 선장님이시죠?
추위 이야기를 하다가 이번에는 어제까지도 더웠던 날을 생각해 냈는지 일항사가 다시 말을 걸어 온다.
-허 허, 정말로 그런가?
인정 안 할 수 없는 웃음소리를 내면서도 속으로는 어린 시절, 산삼도 먹었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상기해본다.
그것은 가느다란 한 개의 뿌리였지만, 엄마의 젊은 시절 고향에서 나물을 캐러 산에 올랐다가 만나게 된 산삼을 자신의 어린 첫아들을 위해 기꺼이 그 인연을 양보해주신 엄마의 선물이었다.
지금껏 내 형편을 살펴보면, 더위에는 유난스레 호들갑을 떨면서도 추위에는 무덤덤하게 반응하며 살아온 것이 이 아침의 브리지 방문에서도 짧은 팔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 아닐까? 그렇듯이 내 몸에 열이 많은 것은 산삼을 먹었던 덕이라는 생각을 환절기만 되면 종종 떠 올리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 역시 예전 같지 않음도 깨달아 가는 거겠지... 엊저녁에는 담요를 한 장 더 꺼내 덮고 서야 잠을 자는 준비를 했을 만큼, 이제는 체력보다는 나이를 먼저 생각해야 할 시점이 온 것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