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태평양을 잘 달리고 있습니다.

by 전희태


F6132(4847)1.jpg 유니막 더치하버 부근


기상도를 들여다봅니다. 우리는 지금 초겨울을 맞이하듯 싸늘한 날씨에 비까지 처량하게 내리는 속을 달리고 있습니다. 몸이 움츠러들어 행여 갑판으로 나가기라도 하면 쌩하니 찬바람이 달려드는 이곳인데 그래도 우리나라의 기상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이고 있을 것 같구려.


잘 지내고 있소? 요새 병원에 가볼 시기가 된 것 같은데 다녀오긴 한 거요? 별일 없을 것으로 믿지만 항시 건강 조심하세요. 당신 건강이 결코 당신 혼자만의 건강이 아니니 말이오.


별로 크게 비싼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재료를 사서 정성 들인 솜씨를 가미하여 직접 만들어 전해주는 묵주 선물을 받고 고마워할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흐뭇한 웃음을 띄우며 바라보는 당신을 그려보니 나도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군요.

큰애 말마따나 선물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좋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맞는 것 같구려.

그리고 중국까지 지참하고 갔지만 수실을 다 쓴 후 그곳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서 끝맺음을 못했던 황실 자수를 집에 돌아가서는 모두 완성하였는지요?


내 방 소파에 앉아 열심히 수를 놓던 당신의 모습이 문득 오랜 기억 속의 앨범이라도 보는 것처럼 되살아나는 구려. 여보! 이번에 돌아갈 항구는 포항입니다.


만약 캐나다 기항 시 수검받게 되는 여러 가지 점검에서 별 지적사항이 없이 잘 끝내어 회사의 체면도 살리고 경비 절감마저 이뤄줄 수 있게 된다면 또 다음 선적지가 호주 뉴캐슬로 결정이 나는 방향으로 되는, 그 두 가지가 다 내 뜻대로 이뤄지면 포항에서 승선하는 다음 항차의 동승을 한 번 더 고려해 봅시다.


여기까지 써두고 나중에 좀 더 덧붙여 완성한 후 보내리라 작정하고 잠깐 쉬려 했는데 그만 하루가 넘어갔구려. 사실 20일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시간으론 아직도 9월 19일입니다.


집 안팎을 깨끗이 닦고 쓸어내 놓은 후 썼다는 당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이제는 몸을 좀 아껴가며 일을 하세요. 너무 피곤하지 않게 생활해야죠. 하기야 당신이 집안을 치워놓고 나면 훤해지는 걸 보고 은근히 그런 솜씨를 부러워하기도 했기에 지금도 청소해 놓았다는 앞마당과 집안을 그려보며 즐거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알류샨 열도가 남쪽을 향해 둥근 호선을 그린 바로 밑(북위 50도, 서경 170도 지점)에 까지 바짝 다가서도록 북상한 후 동진을 하는 이번 항로는 이 계절에 통상적으로 이용하는 항로로 대략 뒷바람을 받으며 항해하는 기대를 갖고 있는 항로이죠.


돌아가는 길은 좀 더 북상하여 알류샨 열도의 북쪽 베링해를 통과하여 예전에 당신이 보았던 유니막의 화산을 보면서 서진하는 길을 택할 겁니다.


어제 대리점에서 전보가 왔지요. 이번 항차 입항하면 우선 BULK CARRIER 점검부터 실시하겠다는 예정을 통보해온 전보였지요.


우리 배 같은 살화물 전용선( 撒貨物專用船)이 나이가 10년이 넘으면 선체가 화물을 싣기에 안전한가를 검사하는 점검이지요.

안전을 위해서는 100번을 실시해도 옳은 일이지만 그 점검을 수행당하는 승선 중인 뱃사람에게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일이라오.


만약 그 점검에서 지적사항이 크게 나오면 배를 다시 수리하여야 하는 막대한 경비와 시간 손실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제 막바지 뒤치다꺼리만 끝내면 그 점검에 대비한 일은 끝나 무사히 잘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검사항들을 체크하면서 사람도 나이를 드니 괄시(?)를 받는데 배도 역시 나이를 먹으니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속으로 웃어봅니다. 사실 우리 배의 선령은 사람으로 비교해보면 환갑이 다된 셈이니 잘 가꾸고 수리도 해서 노후된 부분들을 바꿔줘야 좀 더 오래 잘 쓸 수 있을 게 아니오? 지난번 중국에서의 수리도 다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었지요.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나를 보면서 당신은 내가 퇴직 후의 걱정(?)을 한다고 염려를 하는 모양인데 그런 생각은 기우이니 싹 걷어 치워두세요.


앞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을 지나간 세월 떨어져 살아야 했던 모든 것을 보상받듯 함께 알콩달콩하게 살아도 모자랄 터인데 우리 모두 괜스레 쓸데없는 걱정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소?

그래서 퇴직 후의 시간에다 어떤 환상도 가미하지 않고 그냥 그 삶은 그 삶대로 열심히 살려고 맘먹고 있습니다. 오직 당신과 떨어지지 않고 생활하는 시간이라는 두둑한 보너스를 즐기면서 말입니다.


오늘 아마도 날짜 변경선을 넘어서게 될 겁니다. 그간 이틀에 한 시간씩 당겨주던 시차로 인해 새벽 2시가 되어 잠에서 깨었는데 다시 잠이 찾지 않아 뒤척이다가 이렇게 편지 쓰기에 매달린 겁니다.

새벽 다섯 시가 넘어서고 있습니다. 만보의 운동도 하고 머리도 식힐 겸해서 선내를 한 바퀴 돌아보려고 방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2 항사의 방문 앞을 지나는데 문이 열려있는데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시간 그는 잠자리에 들어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섰던 당직의 피로를 풀어줘야 하는 한밤중을 지내야 하는 입장인데 방에 없는 겁니다. 의아심을 품고 다시 더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1층. 당신도 알지요? 식당과 주방이 있는 층 말이어요. 비디오가 있는 휴게실도 양쪽으로 있지요. 그중 부원들의 휴게실에서 2 항사는 한밤을 같이 당직서는 실항사와 또 같은 시간대에 기관실에서 근무하는 2 기사와 같이 비디오를 보고 있더군요.


-너희들 잠도 안 자고 뭐 하는 거니?

하고 말하면서도 시차에 적응치 못해 잠들지 못하여 고생하는 그들이 안쓰럽습니다.

-어서 가서 잠 좀 자둬라.

이야기하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 중 2 항사는 모르긴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고생할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껏 3 항사 당직을 서다가 2 항사로 진급했으니 당직 시간이 바뀐 데다 시차까지 겹쳤으니 말입니다.


이제 마무리 지어야 할 칸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하품도 나고 눈도 감기지만 지금 자리에 들 수는 없군요. 곧 식사시간이 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되니 말입니다.

무사한 항해와 즐거운 정박 시간이 되고 모든 일들은 순리대로 잘 풀어져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주세요. 항상 당신과 우리 집안을 사랑하고 있는 D.S의 선장님이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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