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반응하기

by 이기장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이 힘든 것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문장일 것입니다. 벌써 조직 생활 15년째지만, 이 말만큼 조직의 본질을 정확히 표현한 문장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군대 중에서도 힘들기로 소문난 해병대에서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그곳에서 지옥을 경험하기도 했고, 반대로 천국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모두 '사람' 때문이었고, '사람' 덕분이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일상의 온도는 극과 극이었습니다. 해병대 시절은 ‘사람이 곧 환경’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2년 동안 육아휴직을 하며 조직을 떠나 있었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매일은 행복했지만, 동시에 고단한 나날이기도 했습니다. 복직이 가까워질 즈음엔 '빨리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사회가 그리웠습니다. 그러나 막상 복직을 하고 나니, 금세 잊고 있던 조직 생활의 현실이 다시금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복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인원이 제 사무실로 배치되었습니다. 이름은 A. 회사에서 오다가다 마주칠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묘하게 불편한 기분이 들던 사람이었습니다. 설마 했지만, 바로 제 옆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불편함도 더 가까워졌습니다.


A는 겉으로 보기엔 악의가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장난이 과하고, 종종 상대를 깎아내리는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농담이 '선을 넘는다'는 걸 본인만 모른다는 것이었죠. 게다가 이런 행동을 친근함으로 포장하기 때문에, 정색하고 받아치기도 어렵습니다. 괜히 예민하거나 속 좁은 사람처럼 보일까 봐 늘 억지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넘기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 칼럼에서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공격적인 언행에 상대가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 자체를 즐긴다. 그래서 반응이 느리거나 없을 때 흥미를 잃는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빠르게 반응하지 말자. 느리게 반응하자.'


그 후로는 A의 말에 예전처럼 바로 반응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표정을 바꾸지 않고, 농담을 받아치지 않고, 그저 필요한 말만 차분히 건넸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 주변 눈치를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A의 관심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반응이 느려지자, 그는 더 이상 저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느리게 반응하기’는 단순히 감정을 참는 일이 아니라, 관계의 주도권을 되찾는 방법이라는 것을.


조직에서 사람 때문에 힘들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속도'를 조절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상대의 말과 행동에 끌려가지 않고, 한 박자 늦게 호흡을 고르는 것. 그 짧은 공백의 순간이 감정을 가라앉히고, 관계를 다시 정돈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조직 생활을 버티게 하는 힘은 ‘빠르게 일하는 능력’이 아니라, ‘느리게 반응할 줄 아는 지혜’가 아닐까 합니다. 조종석에서도, 삶에서도 말이죠.



20251020_01110130000005_M00.jpg 출처 : https://www.mk.co.kr/news/contributors/11445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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